무과에 급제한 이후 1535년(중종 30) 창원부사로 있을 때 의정부와 병조가 의논하여 무장과 사유를 뽑는 자리에서 무신으로 배양할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뽑혀 경변사 심언광(沈彦光)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 왔다.
1540년에는 충주목사로 부임받았다가 무재(武才)가 있다 하여 다시 종성부사에 제수되어 변방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이어 병조참지로 내직에 들어와 있다가 1543년(중종 38) 특별히 가자되어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4월 사량진(蛇梁鎭)에 왜인 200여명이 침입하였을 때 이를 토벌하지 못하여 체직되었다.
당시의 사신(史臣)은 “청간(淸簡: 성품이 깨끗하고 곧음.)하고 근중(謹重: 조심스럽고 신중함.)하여 죽어서도 집에 남은 것이 없어 처자가 굶주리고 곤궁하였으며, 군민을 잘 보살펴 옛 양장(良將)의 풍도가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