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경기도 구리시, 서쪽은 도봉구와 강북구, 북쪽은 경기도 의정부시, 남쪽은 성북구와 중랑구에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7°02'~127°06', 북위 37°36'~37°41'이다. 면적은 35.44㎢이고, 인구는 57만 458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9개 행정동(5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에 있다.
북한산의 말단에 위치하며 100m 이하의 노년기에 속하는 낮은 저산성 구릉지이다. 장기간의 침식으로 깎이고 벗겨져서 구릉화된 낮은 언덕과 한강 및 지류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충적평야가 발달한 지역이다.
사암(砂岩)으로 형성되어 빗물을 흘려버리는 바위산으로 되어 있는 수락산(水落山, 637.7m)과 그 줄기를 이어 불암산(佛岩山, 507m)이 있다. 바위벽과 암반이 많아 계곡이 깊고 수려하여 상계동 벽운동유원지 계곡이 유명하다.
경기도 양주에서 발원하여 의정부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한천 · 한내 · 송계천 · 서원천 등으로도 불린다)이 동부간선도로와 병행하여 남쪽으로 흘러들어간다.
편서풍대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은 13.0°C, 1월 평균기온은 -0.2°C, 8월 평균기온은 27.0°C이며, 연 강수량은 1,681.9㎜내외이다(2015년 현재).
이 지역은 고대부터 수락산 · 불암산 자락과 한강 연안 중랑천변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일찍부터 인류가 살았던 곳이다. 이 일대에서 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인근의 양주 일대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된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일대는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처음 한강 유역으로 내려왔을 때,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송파구 일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지대인 것으로 유추되며, 하북위례성은 한강 북쪽으로 지금의 노원구 일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였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 · 백제 · 신라 3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 이곳을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수락산 서남쪽의 상계동 보루(堡壘)나 불암산 성터 등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구려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 · 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하면서, 결국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이 일대가 내소군(來所郡)의 관할 하에 속하였다.
후삼국시대 ‘노원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에는 양주(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 · 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된 것은 주로 연기사상(延基思想)이라는 일종의 풍수지리적 쇠왕설(衰旺說) 때문이었다. 이때 남경의 범위는 동으로 대봉(大峰: 지금의 낙산), 서로 기봉(岐峰: 지금의 안산), 북으로 면악(面嶽: 지금의 북악산), 남으로 사리(沙里: 지금의 용산)에 이르렀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때 노원역(蘆院驛) 일대가 해촌(海村: 현 도봉구 쌍문동 방학동 일대), 용산(龍山) 등지와 함께 남경의 후보지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1104년(숙종 9)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시되지 않았다.
그 뒤 무인정권과 몽고 침략 등의 정치적 · 군사적 시련을 겪는 사이 남경은 서경과 함께 국왕 순주(巡駐)의 이경(離京)으로서의 가치가 감소되어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것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기반을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과거의 남경인 한양이 물망에 올랐다. 그 뒤 왜구의 침략으로 조운이 원활하지 않자 개경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곧이어 수도의 안보문제가 거론되자 또다시 한양 천도론이 대두되었다.
이리하여 우왕 때는 한양 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 한때 이루어졌으며, 공양왕 때에도 일시 한양 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문제가 최종 결정되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 천도론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여러 지역이 도읍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태조는 이 지역들을 직접 답사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보내 정밀 조사하도록 한 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하고 추진하기 위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다.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 · 종묘 · 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의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도시계획안이 조선시대 500여 년간 수도 서울을 지탱하게 되었다.
수도 건설을 위한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조는 하루라도 빨리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로 옮기고자 해 궁궐 공사가 시작된 한 달 후인 1394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입궁했다.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 · 서 · 남 · 북 · 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하였다.
노원구 일대는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상 양주부(楊州府)에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466년(세조 12) 양주목이 되었다. 이후 연산군에 의해 한때 혁파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복치(復置)되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를 보면 양주목에 34개 면이 있는데, 그 중 노원면(蘆原面)과 해등촌면(海等村面)이 노원구의 일부 지역에 해당된다. 1895년(고종 32) 양주는 한성부 소속으로 바뀌었다가, 이듬해 다시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
이 일대는 일찍이 누원점(樓院店)이라는 장시(場市)가 있어 서울 동북방 지역의 상권을 좌지우지 하던 곳이다. 누원점은 포천에 있었던 송우점(松隅店)과 연계되어 함경도로부터 들어오는 북어 같은 건어물 등 많은 물류가 집하되던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함경도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노원역이 있었는데, 이곳은 교통로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이 장소는 임진왜란 때 고언백(高彦柏)장군이 불암산성을 축성하고 네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노원평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전투는 중랑천을 낀 마들평야, 우이동과 도봉동 일대, 중랑천 상류지역 주변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다가 왜군을 소탕한 전투이다.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 일부에 속하였다. 양주군 노원면에는 온수동 · 납대동 · 가좌동 · 공덕리 · 장기리 · 월계리 · 간촌리 · 은행리 · 양재리 · 용동리 · 묘동리 · 불암리 · 금주리 · 광석리 · 오목리 · 무수동 · 갈해동 · 녹천리가 있었고, 해등촌면에는 상누원리와 무수동이 있었다. 1914년에는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한 글자씩을 따 노해면(蘆海面)으로 개편하였다.
이 지역은 광복 이후 1963년까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으로 있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 · 도 · 군 · 구의 관할구역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서울시로 편입되었다. 이때 변화된 내용을 보면 양주군 해등촌면 상누원리 · 영국리 · 무수동 · 도당리 일부가 서울 도봉리로, 양주군 해등촌면 암회리 · 도당리 · 원당리 일부는 방학리, 해등촌면 소망리 · 우이리 · 계성리 · 원당리 일부를 합쳐 쌍문리, 해등촌면 유만리 · 마산리 · 도당리 · 창동리와 호원면 녹천리 각 일부를 합쳐 창동리가 되었다. 양주군 노원면 월계리 · 양주군 노원면 용동리 · 상곡리 · 가좌동 · 공덕리와 망우면 묵동리 양재동 각 일부를 합쳐 하계리, 양주군 노원면 광석리 · 은행리 · 납대동 · 전주리 · 오목리 · 양재동 각각 일부를 합쳐 중계리, 노원면 간촌리 · 온수동 · 녹천리와 별비면 덕동리 각 일부 및 둔야면 조암동을 합쳐 상계리로 하여 서울 성북구로 편입하고 노해출장소를 새로 설치 이를 관할토록 하였다. 이때 편입된 지금의 노원 지역은 7개 동리에 20개 자연부락이었다.
1973년에는 성북구에 새로 도봉구가 신설되면서 이 지역은 도봉구로 편입되고, 노해출장소는 폐지되었다. 1975년에는 상계3동에서 상계3동과 4동이, 창동에서 창동과 월계동이 분동되었고, 1980년에는 공릉동에서 공릉1동 · 공릉 제2동 · 하계동이, 월계동에서 월계1동 · 월계2동이 각각 분동되었으며, 1985년에는 상계5동이 신설되었다.
이후 1988년 도봉구에서 도봉1·2동, 창1·2·3동, 월계1·2동, 공릉1·2동, 하계동, 중계동, 상계1·2·3·4·5동을 분리하여 새롭게 노원구를 신설하였다. 1989년에는 도봉1·2동과 창1·2·3동을 도봉구로 편입하였고, 상계8·9·10동, 중계2동, 하계2동이 증설되어 19개동이 되었다. 1991년에는 중계3동이 증설, 1992년에는 중계1동이 중계본동과 중계1·4동으로 분동, 1994년에는 월계2동이 월계2·4동으로 분동, 1996년에는 공릉1동이 공릉1·3동으로 분동되는 등의 변화를 거쳐 현재 노원구의 행정동은 24개 동이 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동의 증가는 아파트 건설을 통한 유입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다.
노원구의 유적으로는 서울 태릉과 강릉(사적, 1970년 지정), 서울 초안산 분묘군(사적, 2002년 지정) 등이 있다.
보물로는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보물, 2007년 지정)가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는 연령군 이훤 신도비, 정간공 이명 묘역, 충숙공 이상길 묘역, 충숙공 이상길 묘역 등이 있다. 이훤 신도비는 1980년, 정간공 이명 묘역은 1983년, 충숙공 이상길 묘역은 1988년, 충숙공 이상길 묘역은 1988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사적, 2004년 지정)의 하나인 수락산 보루(水落山堡壘), 삼군부 청헌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등이 있다. 또한 육군사관학교 내 육군박물관에는 부산진 순절도(보물, 1963년 지정), 동래부 순절도(보물, 1963년 지정), 세총통(보물, 1986년 지정), 소총통(보물, 1986년 지정), 불랑기자포( 보물, 1986년 지정), 조흡 고신왕지(보물, 1995년 지정), 대완구(보물, 1986년 지정), 비격진천뢰(보물, 1986년 지정), 각궁 등 군사 관련 유물인 보물과 국가민속문화유산이 소장되어 있다. 각궁은 1976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 학림사 삼신불괘불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6년 지정), 학림사 석불좌상(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2006년 지정) 등이 있다. 사찰로는 671년 원효가 창건한 학림사(鶴林寺)가 상계4동에 있는데, 이는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지세 위에 세웠기 때문에 학림사라 하였다고 한다. 수락산 정상 바로 밑에는 창건 시기를 알 수 없는 용굴암이 있는데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당시 몸을 피해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하루저녁을 묵었던 곳으로 후일에 하사금을 내려 대웅전을 지었다고 한다. 불암산 서쪽 기슭에는 경치가 수려하여 학이 와서 놀았다는 학도암(鶴到庵)이 있다.
예안이씨 이조판서공파종회에서 관리하는 월계동 각심재가 있다. 1977년 지정된 이 건물은 종로구 경운동에 있던 것을 1994년 이곳으로 이전한 것인데,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룡의 작품으로 1930년대 후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월계동 각심재는 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마들농요는 옛날 마들평야에서 농사를 지을 때 힘든 것을 잊고 흥을 돋우기 위해 부르던 노래로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농요이다. 노래는 총 열소리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능보유자인 김완수(金完洙)에 의해 맥이 이어지고 있다. 마들농요는 1999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42개교, 중학교 26개교, 고등학교 25개교, 특수학교 2개교가 있다. 전문대학은 인덕대학이 있고, 대학교는 육군사관학교 · 서울여자대학교 · 삼육대학교 · 광운대학교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 한국성서대학교 등이 있다.
현대적 전시관과 문화관이 함께 있는 곳으로 노원문화예술회관이 있다. 2004년에 개관한 중계본동의 노원문화예술회관은 지하 3층, 지상 6층 규모의 문화예술 종합시설로서 소공연장과 대공연장을 비롯하여 전시실, 다목적홀, 스카이라운지, 잔디광장의 야외무대, 기타 공연부대시설 등을 고루 갖추고 있고, 문화센터에서는 각종 강좌가 이루어진다. 또한 주민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문화의 집이다. 2001년 개관한 문화의 집은 문화관람실, 문화창작실, 문화사랑방, 어린이놀이방, 노래방, 인터넷 · CD · 비디오부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외에도 삿갓봉근린공원에 2003년 개관한 노원어린이도서관은 풍부한 도서와 열람실을 갖추고 있으며, 상계동에 있는 노원청소년수련관은 청소년들을 위한 전용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박물관으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군사전문박물관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안에는 1956년 육군사관학교기념관으로 개관한 박물관이 1985년 현재의 박물관으로 신축하면서 육군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하였다. 6,000㎡ 규모의 전시실, 강당, 사무실 등을 갖추고 있고, 보물 9종 11점을 포함하여 1만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군사관련 각종 유물과 자료를 수집 · 전시함은 물론 국방문화유산에 대한 학술조사와 연구 활동을 겸하고 있으며, 인근에 육군사관학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육사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이 외에 서울여자대학교박물관은 여성사와 생활사 중심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문화원으로는 노원문화원이 1997년 중계동에 창립하여 청소년문화예술제, 음악회, 문화유적탐방, 음악콩쿠르 등의 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영화관으로는 상계동의 유토아시네마와 중계동의 옴니시네마가 있다. 건영 옴니백화점 내에 자리한 옴니시네마는 5개의 상영관을 갖추고 있으며, 1·2관은 중형 스크린을 설치하여 최신 디지털 음향 시스템으로 생동감 있는 사운드를 제공한다. 인터로킹(Inter Locking) 영상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동시 상영이 가능해 동일 프로에 대해 최대 988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도 있다. 백화점 내에 위치해 있어 영화 관람과 쇼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전통문화 행사로는 매년 10월 월계동 각심마을에서 지내는 마들제사가 있다. 이 제사는 태종 때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마을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 뒷산에 있는 각심사의 고승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 고승이 지신에게 제사를 올린 후 풍년이 계속되고 전염병도 돌지 않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각심제의 특이한 점은 제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지 않고 소머리를 올린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수락산 산신제, 우두정 산신제, 불암산 산신제, 하계동 산신제 등 이 지역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만도 14개에 달한다.
현대 문화행사로는 노원문화예술회관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616석을 보유하고 있는 대공연장에서는 각종 뮤지컬공연 및 클래식 · 재즈 · 어린이영어연극 등의 공연이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그리고 소공연장에서는 소규모공연이나 기타연주회 · 음악회 · 음악감상 등의 음악활동과 시민들의 소규모 행사가 개최된다.
노원구민회관 대강당에서는 정기적으로 노원교양대학강좌가 신설되어 다채로운 주제의 강의가 이루어진다. 기타 노원구 관내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내고장 문화유적탐방 행사와 각종 음악회 행사가 정기적으로 개최된다.
이 지역의 스포츠 시설로는 공릉동에 있는 태릉선수촌을 비롯하여 태릉국제사격장, 태릉국제스케이트장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와 일선지도자의 강화훈련을 목적으로 1966년 8월에 대한체육회에서 건립한 태릉선수촌은 각 경기 종목의 국가대표와 예비 국가대표 선수들이 수시로 입소하여 합숙훈련을 하며, 팀워크를 정비하고 전력의 집중적인 향상을 도모하는 곳이다. 최신의 스포츠 과학시설을 설비하여 선수들의 기초체력과 전문 기술 향상을 위해 노력한 결과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결과를 낳았다. 합숙소와 식당을 비롯하여 웨이트 트레이닝 시설, 육상경기장, 인조잔디 축구장, 실내외 각종 구기장, 국제규모의 수영장, 스케이트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태릉국제사격장은 각종 국제 사격대회가 개최되며, 일반인을 위한 클레이 · 공기총 · 권총사격장도 갖추고 있으며, 바로 옆에 골프연습장이 붙어있다. 태릉국제스케이트장은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과 일반 빙상인의 저변확대를 위해 2000년 완공되었다. 이외 태릉 건너편에 태릉컨트리클럽이 자리 잡고 있다.
노원구의 생활체육시설로 상계동의 마들근린공원은 축구장 · 수영장 · 테니스장 시설을 갖추고 있고, 월계동의 초안산근린공원에도 축구장 · 농구장 · 테니스장 · 배드민턴장이 있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중계동의 노해근린공원에는 축구장 시설과 노원구민체육회관이 있다.
정월 초하루에는 설날을 맞아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 있다. 정월 열나흘에는 오곡밥 먹기, 정월 대보름의 부럼 깨기와 더위팔기, 윷놀이,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연등달기, 칠월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 먹기, 추석 차례와 성묘 가기, 동지 때 팥죽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펼쳐진다.
정월 대보름에는 각 동사무소마다 일정한 금액을 지원하여 노인정과 아파트 등을 중심으로 척사대회와 지신밟기, 농악놀이 등이 벌어지며 쥐불놀이 등은 도심지라는 점 때문에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민속놀이로는 단오와 정월대보름을 맞아 구민들이 농악 등 다채로운 민속놀이 행사를 개최한다. 그리고 산신제와 월계동 각심마을에서 행해지는 마들제사 등이 정례적으로 개최된다.
이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중 수락산의 유래와 관련된 전설과 불암산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락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는 아들을 찾는 부정(父情)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사냥꾼이 아들 수락을 데리고 지금의 수락산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 갑자기 큰 소나기가 쏟아져 사냥꾼 부자는 비를 피해 큰 바위 밑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면서 잠이 들었다.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 잠자고 있는 수락을 물어가버렸다. 한참 뒤 잠에서 깨어난 사냥꾼은 아들 수락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초조해진 아버지는 아들 수락을 찾아 헤매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뒤로 비만 오면 산에서 ‘수락아!, 수락아!’ 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산 이름을 수락산이라 하였다고 하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던 산이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어느 날 불암산은 조선왕조가 도읍을 정하는데 한양에 남산이 없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남산이 되고 싶어 금강산을 떠나 한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지금의 불암산 자리에 도착하여 보니 한양에는 이미 남산이 들어서서 자리 잡고 있었고, 불암산은 한양의 남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금강산으로 되돌아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한 번 떠난 금강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돌아선 채로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불암산은 현재 보는 것과 같이 서울을 등지는 형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토지의 43.8%가 임야이고 경지는 전체 토지의 1.1%이다. 대지 26.0%, 학교용지 7.0%, 도로 7.8%, 철도용지 1.8%로 전체 토지에서 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산업 인구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는 49.4%, 도소매업이 15.4%, 숙박 및 음식업이 12.4%, 운수업 12.8%, 교육서비스업이 17.8%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전체 사업체수 가운데 1~4명의 종사자를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전체의 88.2%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1,000명 이상의 사업체는 4개에 불과하다.
예로부터 서울 도성에서 함경도 지방으로 연결되는 육로가 이 지역을 반드시 지나게 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사람들이 쉬어가는 노원역(蘆院驛)과 물류가 집중되는 장시인 누원점(樓院店)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교통면에서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 지역이 서울로 편입된 이후 중랑천변을 따라 개설된 동부간선도로와 동1로를 통해 강남과 도심으로의 연결이 용이해졌다. 철로는 지하철 1호선이 통과하면서 강북 도심지로의 출퇴근이 용이해졌으며, 1985년 지하철 4호선의 개통과 2000년 지하철 6, 7호선의 개통으로 서울 시내 모든 지역으로의 출퇴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자연녹지가 많아 생활환경이 좋은 이 지역으로의 이주가 늘어나게 되었고, 인구 증가로 이어져 행정동이 증가하게 되었다.
노원구의 주요 간선도로는 도로의 크기에 따라 광로(廣路) · 중로(中路) · 소로(小路)를 모두 합하면 총연장은 287㎞에 달하며, 도로 포장률은 99.95%이다. 폭 40m 이상의 넓은 도로는 중랑천변을 따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동부간선도로와 동1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이 도로를 축으로 한글비석길, 노원길, 당고개길, 월계로, 상계로, 화랑로 등이 연계되어 도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 수많은 간선도로망이 형성되어 교통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지하철은 1·4·6·7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의 편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특히 7호선이 노원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한강 이남으로 이동하기가 편리하다.
지하철 1호선은 1971년 시청 앞에서 청량리역까지 공사를 착공하여 1974년에 개통되었고, 전철과 연결되어 성북과 수원을 운행하였다. 이후 의정부 북부와 천안까지 확대하여 모두 59개 역이 되었다. 노원 지역을 지나는 역은 석계역, 광운대역, 월계역, 녹천역이 있다.
지하철 4호선은 당고개역에서 오이도까지 48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80년 착공하여 1985년 개통되었으며, 노원구를 지나는 역은 당고개역, 상계역, 노원역이 있다. 노원역에서는 7호선을 갈아탈 수 있으며, 당고개역은 4호선의 종착역이다.
지하철 6호선은 봉화산역에서 역촌역까지 38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94년에 착공하여 2001년 개통되었으며, 노원구 지역은 2000년 8월 공사가 완료되었다. 노원구를 지나는 6호선 구간은 화랑대역과 태릉입구역이며, 태릉입구역에서 7호선을 갈아탈 수 있다.
지하철 7호선은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에서 구로구 온수역까지 42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90년 착공하여 2000년 8월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이 중에서 노원구 지역은 1996년 10월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노원구 지역을 지나는 7호선은 수락산역, 마들역, 노원역, 중계역, 하계역, 공릉역, 태릉입구역이며, 노원역에서는 4호선을, 태릉입구역에서는 6호선을 각각 갈아탈 수 있다.
공릉동에 위치한 푸른동산은 약 17만㎢ 규모의 자연공원으로 1979년에 만들어졌다. 2003년 이스턴캐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국제 사격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국제사격장과 일반인이 즐길 수 있는 사격장을 갖추고 있으며, 6,000여 평 규모의 야외수영장 시설도 있다. 주변에 녹지가 잘 조성되어 있고,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 많은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불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태릉과 강릉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태릉은 조선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의 능이고,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이자 제13대 왕인 명종과 그 비 인순왕후의 능이다. 두 개의 능이 서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편의상 태강릉이라 부른다.
문화유적인 삼군부청헌당과 많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육군박물관이 있는 육군사관학교도 가볼 만한 장소이다. 우리나라 육군의 기초가 되는 사관생도들을 양성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의 출입도 가능하다.
이 외에도 산수가 수려한 수락산 · 불암산 등에는 유적이 많이 분포해 있어 서울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며, 공릉동의 태릉스케이트장과 수락산 동막골에 위치한 궁도장인 수락정, 수락골 초입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별장 안채인 우우당(友于堂) 등도 가볼 만한 관광자원이다.
또한 상계동의 상계근린공원 · 갈말근린공원 · 온수근린공원 · 수락산당고개지구공원 · 마들근린공원, 중계동의 노해근린공원 · 가재울근린공원 · 달맞이어린이공원(어린이들이 교통질서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어린이교통공원이라고도 함) · 삿갓봉근린공원 · 양지근린공원, 월계동의 초안산근린공원, 하계동의 중계근린공원과 등나무근린공원 등 주거생활지역 인근에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원이 있다.
노원의 먹거리로 예부터 유명한 것은 태릉갈비이다. 공릉동의 태릉과 강릉 주위를 비롯하여 태릉선수촌을 지나면서 갈비집들이 늘어서 있으며, 돼지갈비를 비롯하여 주물럭, 소갈비 등이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노원구의 동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공릉동의 동명은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때 양주군(楊州郡) 노해면(蘆海面) 공덕리(孔德里)의 ‘공(孔)’자와 동쪽 태릉의 ‘릉(陵)’자를 따서 지었다. 조선 초부터 양주목(楊州牧) 노원면(蘆原面)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양주군 노원면이 되었다. 1914년 해등촌면(海等村面)과 합하여 노해면 공덕리가 되었으며, 1963년 서울시 성북구 공릉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도봉구에 속했다가 1988년 노원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경기도 구리시와 남양주시, 서쪽으로 중랑천, 남쪽으로 묵동, 북쪽으로 중계동 · 하계동과 접하고 있다. 문화시설로 태릉선수촌을 비롯하여 태릉국제사격장, 태릉국제스케이트장, 태릉컨트리클럽 등의 체육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대학은 서울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가 있으며, 지하철 6호선과 7호선 및 동부간선도로를 이용하여 강남으로의 이동이 편리하다. 행정동은 공릉1·2동의 2개 동이 있다.
노원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상계동 동명은 중랑천의 위쪽에 위치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초부터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노원면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양주군 노원면이 되었다. 1914년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가 되었으며, 1963년 서울시 성북구 상계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도봉구에 속했다가 1988년 노원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서쪽으로 도봉구, 남쪽으로 중계동, 북쪽으로 의정부시와 접하고 있다. 상계동에서는 동부간선도로와 지하철 7호선과 4호선을 이용하여 강남으로의 이동이 편리하고, 노원역에서 서로 환승할 수 있다. 노원구청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동은 상계1동에서 상계10동까지 10개 동이 있다.
노원구의 서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월계동의 동명은 중랑천(中浪川, 漢川이라고도 함)과 우이천(牛耳川)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지형이 반달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초부터 양주목 노원면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양주군 노원면이 되었다. 1914년 양주군 노해면 월계리(月溪里)가 되었으며, 1963년 서울시 성북구 월계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도봉구에 속했다가 1988년 노원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중랑천, 서쪽과 남쪽으로 성북구, 북쪽으로 도봉구와 접하고 있다. 대학은 광운대학교와 인덕대학이 있고, 전철 1호선과 동부간선도로를 이용하여 강남으로의 이동이 편리하다. 행정동은 월계1동에서 월계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노원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중계동 동명은 이 지역이 중랑천의 중간에 위치해서 붙여진 것이다. 조선 초부터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양주군 노원면이 되었다. 1914년 양주군 노해면 중계리(中溪里)가 되었으며, 1963년 서울시 성북구 중계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도봉구에 속했다가 1988년 노원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은 경기도 남양주시, 서쪽과 북쪽은 상계동, 남쪽은 하계동 · 공릉동과 접하고 있다. 지하철 4호선과 7호선 및 동부간선도로를 이용하여 강남으로의 이동이 편리하다. 행정동은 중계본동과 중계1동에서 중계4동까지 5개 동이 있다.
노원구의 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하계동 동명은 이 지역이 중랑천 아래쪽에 위치하므로 붙여진 것이다. 조선 초부터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에 속하였고, 1895년 한성부 양주군 노원면이 되었다. 1914년 양주군 노해면 하계리(下溪里)가 되었으며, 1963년 서울시 성북구 하계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도봉구에 속했다가 1988년 노원구의 법정동이 되었다. 위치는 동쪽으로 공릉동 · 중계동, 서쪽으로 월계동, 남쪽으로 공릉동 · 월계동, 북쪽으로 중계동과 접하고 있다. 지하철 7호선과 동부간선도로를 이용하여 강남으로의 이동이 편리하다. 행정동은 하계1동과 하계2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