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구 ()

양천구청
양천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위치한 구.
정의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영등포구와 한강, 서쪽은 경기도 부천시, 북쪽은 강서구, 남쪽은 구로구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53'~127°57', 북위 37°31'~37°35'이다. 면적은 17.40㎢이고, 인구는 48만 453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8개 행정동(3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6동에 있다.

자연환경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호상편마암질 기반암이 오랜 침식을 받아 파랑상의 저구릉을 형성하며, 낮은 구릉지대 사이로 안양천의 지류가 동류해 안양천과 합류하고 다시 북류해 한강으로 유입한다. 안양천과 한강 연안에는 두꺼운 충적층으로 된 넓은 범람원이 형성되어 있다.

목동 신시가지에 위치한 용왕산(龍王山, 78m)과 구로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칼산(76m), 부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양산, 신월동의 주산을 이루고 있는 증산(甑山) 등 비교적 낮은 구릉의 산들이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서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흐르는 안양천과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는 도림천이 양천구 신정동 신정 1교에서 만나 양천구 목동을 지나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기후상 온대로 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연평균 기온은 12.8°C, 1월 평균기온은 -3.2°C, 8월 평균기온은 25°C이며, 연 강수량은 1,380㎜ 내외이다.

역사

이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까운 김포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신정동 은행정마을 뒷산에서 발견된 고인돌, 신정동 토성지에서 채집된 청동동촉 등의 유물로 볼 때 청동기시대에 이곳에 인류가 거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국가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특히 백제의 유적으로 생각되는 신정동의 토성을 고려할 때 이 지역은 일찍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남하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면서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력이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라인이 서로 대립되었고,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는 이 지역이 공암현으로 변경되어 율진군(栗津郡, 부천군의 옛 이름)에 속하였다.

후삼국시대 ‘양천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에 호족세력들이 건재하였는데 한강 유역 일대에는 왕규(王規)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고,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인 금주강씨(衿州姜氏 혹은 衿川姜氏) 세력과 풍덕유씨(豊德柳氏) 세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금주강씨는 금천구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풍덕유씨 세력들은 한강 하류의 마포 서쪽지역 일대에 웅거하고 있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 공암현으로 계속 불리다가 995년(성종 14) 고려의 행정구역을 5도로 나눌 때 양광도에 귀속되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수주군(부천군의 옛이름)에 속하였다. 행정구역이 변하는 과정에서 양원, 양평, 파릉, 제양 등으로 개칭되었고, 1310년(충선왕 2)에 양천으로 바뀌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수도를 한강 북쪽의 한양으로 옮기고 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1394년(태조 3) 먼저 경기도를 좌·우도로, 양광도를 충청도로, 강릉교주도를 강원도로, 서해도를 풍해도로 바꾸었는데, 이때 양천은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양천에는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어 다스렸으나 1414년(태종 14)에 김포와 양찬을 합하여 김양으로 하였다가 한달 후에 다시 금천과 양천을 합쳐 금양현으로 하고 양천과 통합하였던 김포는 부평과 통합하였다. 1416년에는 합병한 군현을 다시 원상태로 복구하면서 양천현으로 복구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에 의해 현이 폐지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복구되었고, 1586년(선조 19)에는 양천현에서 아비와 계모를 살해하는 강상죄(綱常罪)가 발생하여 읍호가 강등되었다가 1598년 경 다시 회복된 이후 1895년까지 지속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을 23개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소속의 양천군이 되었으며,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됨에 따라 다시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제 침탈한 일본은 조선의 전통적인 지방제도와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행정 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여 1914년 지방제도를 12부, 317군에서 12부, 220개 군으로 폐지 혹은 통합하였다. 이때 양천군도 통진군과 함께 김포군으로 통합되었으며, 양천군 5개 면도 양동과 양서 2개 면으로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양천군에 해당하는 남산면과 장군소면이 양동면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양천군의 하위 행정 구역인 15개 리는 가양리, 마곡리, 등촌리, 양화리, 화곡리, 염창리, 목동리, 신당리, 신정리, 내발산리, 외발산리, 송정리, 과해리, 방화리, 개화리 등이며, 이들 지명은 현재까지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다.

1936년에는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시흥군에 속했던 영등포 일대와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 염창리, 목동리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이 일대는 한강과 안양천 등의 큰 강이 인접해 있는 평탄한 저지대로서 논보다 밭이 많았으며, 그나마도 수해와 범람의 피해가 많았던 곳이었다. 특히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맞아 방조제가 무너지고, 농지가 유실·매몰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1938년 배수기의 설치와 배수로의 개설, 한강변 제방의 축조 등 개량공사를 수행함과 동시에 양천수리조합을 설립하면서 저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논농사가 가능해지면서 벼 생산량이 증가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지역이 광복 이후에도 경기도 김포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1963년 1월 1일부터이다. 이때 서울시의 영역을 대규모로 확대하면서 김포군 양동면, 양서면 전역과 부천군 오정면과 소사읍의 각 일부, 시흥군 신동면 전역과 시흥군 동면 중 시흥·독산·가리봉·신림·봉천의 각 동이 영등포구로 편입되었으며, 1977년 9월 1일에는 안양천 서쪽 지역인 염창·목·등촌·화곡·마곡동 등 16개 동이 분할되어 강서구로 독립하였다.

이후 강서구는 목동 신시가지 개발 등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분리하여 김포군의 양동면과 양서면, 그리고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와 오쇠리를 관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1914년에 잃어버렸던 양천의 옛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유물·유적

역사적인 문화유적으로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순암 안정복이 조선 태조부터 영조 때까지의 역사를 왕별로 정리한 열조통기와 1613년(광해군 5)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 때 공을 세운 성시헌에게 내린 공신록인 성시헌익사공신록이 199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2010년 타지역으로 반영구 반출됨에 따라 지정 해제되었다. 이 외에 열녀문이 하나 남아 있다.

신정동의 세 번 안쳐 빚은 술인 삼해주(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1993년 지정)는 이동복이 보유자이며 1993년 지정되었다. 목동의 화문석으로 만드는 초고장(서울시특별시 무형문화재, 1997년 지정)은 한순자가 보유자이며 1997년 지정되었다. 신정동의 체공예인 체메우기(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1998년 지정)는 최성철이 보유자이며 1998년 지정되었고, 목동의 왕골과 비슷한 용수초로 만드는 등메장(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2002년 지정)은 최헌열이 보유자이며 2002년에 지정되었다.

교육·문화

이 지역의 초등학교로는 1972년 개교한 신정동의 양동초등학교가 제일 오래된 학교이고, 중학교는 1905년 설립된 양정중학교가 제일 오래 되었으며, 그 다음에 목동에 있는 영도중학교가 1938년에 설립되었다. 고등학교는 목동의 진명여자고등학교가 1906년에 설립되어 제일 오래되었다. 2015년 현재 초등학교는 30개교, 중학교는 19개교이며, 고등학교는 14개교가 있다.

현대적 전시관과 문화관이 함께 있는 곳으로는 목동에 1998년 개관한 양천문화회관이 있다. 지하 2층, 지상 4층의 연면적 12,563㎡ 규모로 각종 공연, 영화 상영, 기획 전시회, 강연 등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평생학습지원센터는 청소년을 위한 영화, 인터넷 부스 등이 있어 청소년들의 건전한 만남의 장으로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양천문화원은 1997년 개설되어 문화유적탐방, 우수영화상영, 교양강좌 개설 등의 문화사업과 전통문화축제 등의 행사를 주관하고 있으며, 웅변대회, 음악회, 사생대회 등의 문화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영화관으로는 7개 상영관을 갖춘 극장 CGV가 목동 현대백화점 내에 있으며, 공연장은 양천문화회관과 청소년회관에 대공연장이 있고, 야외공연장으로 목동의 파리공원, 신정동의 양천공원과 계남공원에서 무대행사와 마당놀이 등이 펼쳐진다. 이 외에도 목동에 SBS방송국, CBS방송국과 한국방송진흥원, 한국통신정보전산센터에도 공연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신월동의 청소년문화센터, 목동의 청소년수련관 등에서는 청소년을 위한 체험학습과 놀이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종합전시관의 기능을 하는 곳으로는 목동에 1998년 개관한 양천문화회관을 비롯하여 청소년회관, 양천문화원 등이 있다.

신정동에 있는 양천구민체육센터는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로 대형체육관과 소형체육관을 갖추고 있으며, 수영·에어로빅·탁구·헬스 등의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신월동의 신월문화체육센터는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로 대강당, 소강당, 헬스장, 수영장 시설을 갖추고 유아수영, 에어로빅 등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목동에 있는 아이스링크장은 겨울철 스포츠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신정동에 있는 해누리체육공원에는 인조잔디축구장, 풋살경기장, 테니스 하드코트, 클레이코트, 족구장, 게이트볼장, 농구대 등의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 외에도 목동테니스장 등이 있다.

민속

이 지역만의 특별한 세시풍속은 없으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계절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세시풍속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정월 초하루에는 설날을 맞아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 있다. 정월 열나흘에는 오곡밥 먹기, 정월 대보름의 부럼깨기와 더위팔기, 윷놀이,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연등달기, 칠월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 먹기, 추석 차례와 성묘가기, 동지 때 팥죽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펼쳐진다.

민속놀이로는 양천문화원의 주관하에 정월 대보름에 안양천 둔치에서 벌어지는 제기차기, 팽이치기, 달집태우기, 강강수월래, 다리밟기, 부럼깨물기, 활쏘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줄다리기, 윷놀이 등 구민들이 모여 대대적인 민속축제 행사를 개최한다.

설화·민요

이 지역은 안양천을 끼고 있고 낮은 구릉의 산지가 있어 이와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다. 안양천과 관련해서는 오목교 전설이 있고, 산지와 관련해서는 용왕산전설과 우렁바위전설이 있으며, 신월동의 자연마을인 곰달래 마을에 얽힌 사랑의 전설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곰달래에 얽힌 사랑의 전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강 유역이 백제 땅이었을 때 이곳에 서로 사랑하는 음소(音召)와 음월(音月)이라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신라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끊임없이 백제를 위협하자 전국에 군인을 모집하는 명령이 내려졌고 이곳에 살던 청년 음소도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동산에 둥근달이 깃발처럼 떠오르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리고, 칠흑 같은 밤이 되면 백제가 싸움에 진 것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는 말을 한 후 전쟁터로 떠났다. 몇 날이나 계속되던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끝나갈 무렵 동산에는 손톱 반만큼이나 작은 조각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커다란 둥근달이 되었다. 여인은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다시 캄캄한 밤으로 바뀌었고 이에 놀란 여인은 산 위에 올라가 아래로 몸을 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구름이 지나가 다시 밝고 커다란 달이 나왔으며 얼마 후 밤새 먼 길을 달려온 청년 음소가 도착하였으나 이미 사랑하는 여인 음월의 목숨은 끊어진 상태였다. 산꼭대기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자신의 손으로 여인을 묻고 돌아서며 청년은 “이제 끝이다. 거친 세상 끝이구나.”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고음월(古音月)이 되었다고 한다. 고(古)는 이두음으로 사용할 때 거칠다. 끝났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바로 음월이의 목숨이 끝났다는 표현으로 이것이 변해 고음월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산업·교통

토지의 6.9%가 임야이고 경지는 전체 토지의 0.5%이다. 대지 49.5%, 하천 1.7%, 학교용지 4.5%, 도로 17.8%, 철도용지 1.3%로 전체 토지에서 대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산업 인구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는 9.1%, 건설업 4.4%, 도소매업이 19.1%, 숙박 및 음식업이 10.6%, 운수업 10.3%, 금융 및 보험업 2.5%, 부동산 및 임대업 4.3%, 사업서비스업 7.2%, 교육서비스업이 10.8%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전체 사업체수 가운데 1~4명의 종사자를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전체의 85.5%의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1000명 이상의 사업체는 2개에 불과하다.

예로부터 서울과 한강 이남의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요충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다. 현대에 서울 강북의 도심과 한강 이남지역을 연결하는 다리가 가설되면서 양천 지역은 서울 서남부 지역과 연결되는 주요한 지점으로 부상되었다. 특히 1965년 양화대교의 개통을 시작으로 서울의 중심과 경인 및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결되는 길목에 놓인 성산대교가 가설되면서 인적 물적 교류가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져 이 지역이 교통의 길목으로 부상하였다.

나아가 지하철시대가 개막되면서 도심 순환선인 2호선의 지선이 연결되었고, 5호선이 양천구의 동서를 관통하면서 더욱 교통이 편리해졌다.

양천구의 주요 도로는 남북으로 이어지는 남부순환로와 강서로 및 안양천길이 있고 동서로 연결되는 경인고속도로와 오목로 등이 서로 이어지면서 편리한 도로교통을 제공하고 있다. 도로의 크기에 따라 광로(廣路)·중로(中路)·소로(小路)를 모두 합하면 총연장은 397㎞에 달하며, 도로 포장률은 100%이다.

폭 40m 이상의 넓은 도로는 남부순환로와 오목로, 제물포길, 가로공원길 등이 있고, 이 외에 등촌로, 신정로, 신월로, 목동동로와 목동서로, 등촌로, 곰달래길, 화곡로, 강서로, 모세미길, 안양천길 등의 간선도로가 있다.

이 지역을 지나는 지하철은 순환선인 2호선의 지선과 5호선이 연결된다. 지하철 2호선은 서울 강남과 강북의 도심권 43개 역을 순환하는 노선으로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1984년 5월 완공되었다. 그리고 신도림역에서 5호선 까치산을 연결하는 신정지선이 1992년 5월 완공되었는데 이 지선 가운데 양천구를 지나는 구간은 양천구청역과 신정네거리역이다.

그리고 지하철 5호선은 마천역과 상일동역에서 각각 출발하여 강동역에서 만나 방화역까지 50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90년 착공하여 부분적으로 개통을 시작하여 1996년에 완전 개통되었다. 양천구를 지나는 5호선 구간은 오목교역, 목동역, 신정역(은행정역)이 있다.

관광

양천구에 있는 공원은 목동에 목마공원·파리공원·오목공원·목동공원·달마을공원·용왕산공원이 있으며, 신정동에는 양천공원·신트리공원·계남공원·칼산공원이 있다. 신월동에는 신월공원·독서공원·오솔길공원·한울공원·양지공원·곰달래공원 등이 있으며, 각종 체육시설과 공연장 등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안양천에는 생태공원을 만들어 인라인스케이트장, 자전거도로, 산책길 등을 조성하였다. 1999년 개장된 목동의 자연학습장에서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을 심은 자생식물원, 원예종으로 외국에서 건너와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원예식물원, 덩굴을 뻗어 살아가는 덩굴식물원, 우리들이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을 심은 농작물원, 각종 장미를 종류별로 식재한 장미원 등으로 구분하여 식재하였으며, 연중 무휴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전통문화 행사로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날에 안양천 둔치에 주민들이 모여 제기차기, 팽이치기, 달집태우기, 강강수월래, 다리밟기, 활쏘기 등 다양한 행사를 양천문화원의 주관하에 개최하고 있다.

동(洞)
  1. 목동(木洞)

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목동의 동명 유래는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 있었기 때문에 목동(牧洞)이라 하였다가 점차 표기가 달라져 목동(木洞)으로 되었다는 설과, 옛날부터 나무가 매우 많았으므로 목동(木洞)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양천현(陽川縣)에 속하였고, 1895년 양천군 남산면(南山面)이 되었으며, 1914년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木洞里)라 칭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목동이 되었으며, 1977년 강서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분리 신설할 때 양천구 관할이 되었다. 동의 서쪽과 북쪽에는 강서구, 동쪽에는 안양천을 따라 영등포구, 남쪽에는 신정동이 접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양천문화회관과 양천문화원, CGV영화관, SBS방송국, CBS방송국, 한국방송진흥원, 한국통신정보전산센터 등이 있다. 행정동으로는 목1동에서 목6동까지 6개 동이 있다.

  1. 신월동(新月洞)

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신월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이 고을 원님이 양천향교(陽川鄕校)를 지나 현 화곡아파트 부근 돌다리 앞에 이르러 전망을 보니 마을이 신선하고 반달 모양을 하고 있어 신월리(新月里)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양천현에 속하였고, 1895년 양천군 남산면이 되었으며, 1914년 김포군 양동면 신당리(新堂里)라 칭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월동이 되었으며, 1977년 강서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분리 신설할 때 양천구 관할이 되었다. 동의 서쪽은 경기도 부천시, 북쪽은 강서구, 동쪽은 신정동, 남쪽은 구로구에 접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청소년문화센터, 신월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연구소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있다. 동의 중앙을 남부순환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고 남쪽으로 서부화물트럭터미널이 있다. 행정동으로는 신월1동에서 신월7동까지 7개 동이 있다.

  1. 신정동(新亭洞)

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신정동 동명의 유래는 이 동의 자연마을이었던 신기(新機, 新基, 신트리, 새터)의 ‘신’(新)자와 은행정(銀杏亭)의 ‘정’(亭)자를 딴 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양천현에 속하였고, 1895년 양천군 남산면이 되었으며, 1914년 김포군 양동면 신정리라 칭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정동이 되었으며, 1977년 강서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분리 신설할 때 양천구 관할이 되었다. 동의 서쪽은 신월동, 북쪽은 목동, 동쪽에는 안양천을 따라 영등포구, 남쪽에는 구로구가 접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양천구민체육센터가 있으며, 양천구청과 양천경찰서,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점, 양천세무서 등 행정기관들이 모여 있다. 행정동으로는 신정1동에서 신정7동까지 7개 동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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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하천』(이상배, 2000)
『경조부지』(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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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육백년사 민속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0)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서울육백년사』1~6(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2006)
『한경지략』(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6)
『동국여지비고』(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6)
양천구(search.yangcheon.go.kr)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이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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