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난공신 ()

목차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광해군 때 김직재(金直哉)의 옥을 다스리는 데 공이 있던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 광해군 때 김직재(金直哉)의 옥을 다스리는 데 공이 있던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내용

1612년(광해군 4) 2월 봉산군수 신율(申慄) 등이 당시 황해도에 있던 김직재·백함(百緘) 부자가 역모를 주동하였다고 무고함에 따라 김직재의 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옥사는 결국 당시 권신(權臣)이던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왕손인 진릉군(晉陵君)을 비롯한 소북파(小北派)의 잔당을 뿌리뽑기 위한 무옥(誣獄)으로 연결되었다. 이 옥사에는 많은 반대도 있었으나 끝내 허구로 얽어 성취되었으며, 이 옥사에 참여한 신율·이이첨·이산해(李山海) 등에게 형난공신의 훈호를 내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무려 170명이 책록되었으나, 뒤에 1등 2명, 2등 12명, 3등 10명으로 모두 24명이 녹훈되었는데, 수공자로는 신율만 기록되었을 뿐 명단을 밝히지 않았다. 형난공신은 광해군 때 책록된 위성공신(衛聖功臣)·익사공신(翼社功臣)·정운공신(定運功臣)과 더불어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大北派)가 몰락하면서 공신호가 삭탈되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