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광해군 4) 2월 봉산군수 신율(申慄) 등이 당시 황해도에 있던 김직재·백함(百緘) 부자가 역모를 주동하였다고 무고함에 따라 김직재의 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옥사는 결국 당시 권신(權臣)이던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왕손인 진릉군(晉陵君)을 비롯한 소북파(小北派)의 잔당을 뿌리뽑기 위한 무옥(誣獄)으로 연결되었다. 이 옥사에는 많은 반대도 있었으나 끝내 허구로 얽어 성취되었으며, 이 옥사에 참여한 신율·이이첨·이산해(李山海) 등에게 형난공신의 훈호를 내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무려 170명이 책록되었으나, 뒤에 1등 2명, 2등 12명, 3등 10명으로 모두 24명이 녹훈되었는데, 수공자로는 신율만 기록되었을 뿐 명단을 밝히지 않았다. 형난공신은 광해군 때 책록된 위성공신(衛聖功臣)·익사공신(翼社功臣)·정운공신(定運功臣)과 더불어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파(大北派)가 몰락하면서 공신호가 삭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