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관장(壺棺葬)’이라고도 한다. 주로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 또는 발견된 곳은 부여 염창리·능산리·남산리·송국리·봉정리 등이다.
호관(壺棺)은 백제토기 특유의 항아리〔壺〕를 널〔棺〕으로 사용했을 때로 한정된다. 독〔甕棺〕과 호관의 차이는 규모나 형태에 의해 구분된다. 호관묘의 주체부를 이룬 널은 백제토기 항아리만을 사용하며 규모는 높이 60∼100㎝로 한정된다.
형태는 밖으로 벌어진 아가리, 짧고 작은 목, 주로 구형(球形)의 몸통과 둥근 바닥으로 이루어졌다. 태토(胎土)는 곱고 흑회색의 경질토기(硬質土器)이다. 바닥이나 그 가까운 곳에는 대개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어 배수공(排水孔)의 기능을 한다.
남산리 출토의 경우처럼 2개의 항아리를 맞댄 이음식〔合口式〕도 있지만, 대개는 하나의 항아리를 외널〔單棺〕로 사용하고 뚜껑을 덮었다. 이때 뚜껑은 널의 길이를 연장하지 않고 단순히 항아리입을 막아주는 구실만 한다.
호관은 독립적으로 발견되기도 하며 돌방무덤과 한 봉토 내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때는 배장(陪葬)의 성격을 띤다. 매장방법은 호관의 크기보다 약간 넓게 토광을 파거나 돌덧널〔石槨〕을 만들고 그 안에 항아리를 직립하지 않고 수평으로 횡치(橫置)하였다.
부장된 유물은 거의 없으나 염창리 호관에서는 금동제귀걸이가 출토되었다. 호관은 그 크기가 1m 미만으로 어른을 펴묻기〔伸展葬〕하기에는 부적당하며 2차장으로 보인다.
호관묘는 지배층의 무덤이 아닌 일반 서민들의 묘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성연대는 대략 6세기 중엽으로부터 7세기까지이며, 약 1세기동안 성행하였다. 이후 불교의 보급으로 유행한 화장분묘(火葬墳墓)에 흡수,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