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창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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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명성황후시해사건 · 단발령 ·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의 사건에 자극을 받아 전라도 광주에서 조직되었던 의병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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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6년 명성황후시해사건 · 단발령 ·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의 사건에 자극을 받아 전라도 광주에서 조직되었던 의병부대.
내용

1895년 8월 을미사변 후 전라도 일원에서 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洵)·기삼연(奇三衍) 등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거의토왜(擧義討倭)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특히,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듬 해 2월 제천의진(堤川義陣) 유인석(柳麟錫)의병장의 격문이 호남에 이르렀다.

이에 기우만은 격문을 띄워 복수토왜(復讐討倭)를 기치로 군사를 일으켜 서울에 올라가 고종을 환궁시켜 보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3월 각 고을에서 호응하자, 기우만은 광산부(光山府)의 향교에 들어가 제반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니 광주부의 관리들이 모두 피신하였다.

이 때 장성의 기삼연이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와 군무(軍務)를 자원하였다. 기우만은 대장으로 추대되자, 고광순·기삼연·기주현(奇周鉉)·양상태(梁相泰)·기동관(奇東觀)·이승학(李承學)·기재(奇宰)·기동로(奇東魯)와 함께 나주로 가서 단을 쌓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사당과 금성산(錦城山)에서 제사를 올려 호남창의진을 결성하였다.

이어 고종에게 소를 올리고,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광주를 창의소의 중앙본부로 삼고 광주에서 모일 것을 요청하였다. 이 때 나주의진에서 병력이 강한 나주에 머무를 것을 간청했으나 다른 의진과의 약속를 어길 수 없음을 들어 진을 옮겨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한편,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가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해 의병에 협조한 군수들을 검거하고 살육·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대한 방어책을 논의했으나 대책이 없어 창의진은 크게 동요하였다.

4월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이 은근히 회유하자 경직되었던 창의진의 형세가 다소 완화되었다. 기우만은 의병활동이 오히려 고종에게 위해가 됨을 염려해 자수하고 의거한 명분을 밝히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해 의진을 해산시켰다.

이 결정에 대해 기삼연은 반대하고 재거를 계획했으나 누설되어 붙잡히자, 4월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의 의병운동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의병운동사에 있어서 선유사에 의해 쉽게 해산한 명분주의적 의진의 대표적인 예가 호남창의진이었다고 평가된다.

참고문헌

『매천야록(梅泉野錄)』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의병과 독립군』(윤병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한말의 의병항쟁」(이상식, 『전남사학』 4,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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