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조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천도교 도사 · 장로를 역임한 천도교인 · 독립운동가.
이칭
유암(游菴)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5년(고종 2)
사망 연도
1938년
출생지
평안남도 용강
관련 사건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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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천도교 도사 · 장로를 역임한 천도교인 · 독립운동가.
개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호는 유암(游菴). 평안남도 용강 출신.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1886년(고종 23)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首接主)·대접주(大接主)·창의대령(倡義大領) 등을 역임하고 동학혁명에 가담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0년 이후에는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국외의 독립단체에 제공하였다. 1919년 2월 25일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을 배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 천도교 간부들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성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로 하였다.

27일 서울 재동(齋洞)의 김상규(金相奎) 집에서 오세창·최린(崔麟)·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과 다시 만나,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 재동의 손병희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 준비사항을 최종 협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의 도사(道師)·장로(長老)를 지내면서 청소년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삼일운동비사』(이병헌, 시사시보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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