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인암(仁菴). 서울 출신. 천도교인이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선두에 서서 탐관오리와 포악한 토반들을 물리치는 데 노력하였다. 그 뒤 천도교 도사(道師)로 교세확장과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2월 25일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고종의 국장을 배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천도교 대표들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하여 듣고 찬성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27일 재동의 김상규(金相奎) 집에서 오세창·최린(崔麟)·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 천도교 동지와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서명날인하였다.
이튿날인 28일 밤 재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 준비사항을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붙잡혀 2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6년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일제에 붙잡혀 신의주 감옥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