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약(汝約). 홍경주(洪景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우용(洪遇龍)이고, 아버지는 홍택(洪澤)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이 되고, 1615년(광해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지평이 되어 여악(女樂)과 우희(優戱)를 금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 뒤 부교리·헌납·이조좌랑·이조정랑·예문관응교 등을 거쳐, 1622년 홍문관전한에 제수되어 보덕을 겸임하였다.
채겸길(蔡謙吉)·이상항(李尙恒)·서국정(徐國楨)·이일형(李日馨)·이위경(李偉卿) 등과 같이 이이첨(李爾瞻)에 동조하여 1618년 폐모론을 앞서 주장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이이첨과 함께 참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