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평원 출생. 1920년 용산예수성심신학교(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에 입학하여 신부수업을 마친 뒤 1933년 5월라리보(Larribeau,A.J., 元亨根) 주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 보좌신부, 평양교구장 비서, 영유(永柔)·순천(順川) 본당 주임 신부를 거쳐, 1942년 평양교구장 직무대리를 역임하다가 1943년 3월 평양교구의 교구장이 되었다. 한국인으로는 1942년 1월 서울교구장에 취임한 노기남(盧基南) 주교에 이어 두번째 교구장이 되었다. 홍용호 교구장이 주교로 임명된 것은 1944년 3월이며, 같은 해 6월 29일 평양 산정현 임시 성당에서 서품식을 거행했다.
본당신부 직책 외에 주로 교회 출판물 간행을 담당하였고 보좌신부 때인 1934년 평양교구 출판위원으로 임명되어 평양교구가톨릭운동연맹 중앙부의 기관지인 ≪가톨릭연구강좌≫를 창간하고, 같은 해 이를 ≪가톨릭연구≫로 발전시켜 편집장 겸 주필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8월 평양교구가톨릭운동연맹 의장으로 선임되어 평신도 중심의 전교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937년≪가톨릭연구≫를 ≪가톨릭조선≫으로 개편한 뒤 이 잡지를 부스(Booth,W.) 신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교구 출판업무만을 전담하였다.
1936년 ≪가톨릭청년≫이 폐간된 뒤 한국가톨릭의 문화·학술을 유일하게 대변하고 있던 ≪가톨릭조선≫은 재정난으로 결국 1938년 12월호로 폐간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관할하에 있던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과 함께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의하여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후 일제에 징발되었던 관후리 주교좌성당을 되찾기 위하여 북한 공산정권과 교섭하였고, 1946년 성당을 되돌려받은 뒤 성당 신축공사에 착수하였다.
1949년 5월 함흥교구의 사우어(Sauer,B.) 주교 체포 및 덕원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 몰수에 항의하기 위하여 북한 내무상에게 면담을 청하였으나, 면담예정일인 5월 14일 납치되고 말았다.
그 뒤 1949년 말까지 평양 교화소(敎化所) 특별정치범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것까지는 확인되었으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50년 10월 18일경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수용소에서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