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시(應時). 홍귀손(洪貴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이평(洪以平)이고, 아버지는 직장 홍덕렴(洪德濂)이며, 어머니는 이세성(李世成)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진사가 되고, 157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해미현감이 되었고, 곧이어 군기시부정을 지내고, 서천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회양부사로 발탁되었다. 서천을 떠나려고 할 때 군민들이 유임을 바라면서 길에서 호곡(號哭)하였다고 한다.
뒤에 오위장이 되어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몽진을 호가(扈駕)하여 서행(西行)하던 도중 형조참의가 되었고, 곧이어 삼척부사가 되었다.
1595년 삼척에 쳐들어온 왜군과 싸워서 잡은 포로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섞여 있었으므로 이들을 관찰사에게 압송하려고 하였으나 술에 취한 그의 아우 인간(仁侃)이 동족을 해친 놈들이라고 격분하고 그 포로들을 형 몰래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그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죄없는 백성들을 함부로 죽인 것이라고 잘못 보고되었다.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조사, 보고하도록 본도 감사에게 지시하였으나, 감사는 원래 인걸의 명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참혹하게 고문하여 거짓 자복케 하였다.
그 때 윤근수(尹根壽) 등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극력 구원하려 하였지만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9년 동안이나 투옥되어 있다가 결국 옥사하였다. 그 원인은 사돈인 정철(鄭澈)이 동인의 배척을 받고 있어 그 화가 그에게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