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 출신. 자는 사백(思伯), 호는 손지(遜志), 본관은 남양(南陽). 1881년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 때 순절한 홍재학(洪在鶴)의 친형이다. 일찍이 홍재학과 함께 양평의 이항로(李恒老)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868년 이항로 사후에는 그 적전(嫡傳)을 계승한 김평묵(金平默)을 사사하였고 나아가 김평묵의 사위가 되었다. 1876년에는 김평묵을 따라 가평군 귀곡(龜谷)으로 이주하였다. 1891년 김평묵이 죽자 횡성으로 이거, 이곳에서 문인을 양성하며 일생을 보냈다.
1876년 개항 문제를 두고 조야에서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날 때, 소수(疏首)가 되어 유인석(柳麟錫), 윤정구(尹貞求), 유기일(柳基一) 등 화서학파 48인과 함께 「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소(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請絶和疏)」를 올려 개항 절대불가를 주창하였다.
그 뒤 1881년 신사척사운동 때에는 홍재학이 소수가 된 「관동유소(關東儒疏)」를 실제 집필하는 등 화서학파 위정척사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한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편,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說)을 둘러싸고 화서학파 내에 김평묵과 유중교(柳重敎) 양인을 정점으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홍재구는 유기일(柳基一) 등과 함께 김평묵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유인석 등 유중교 계열의 인물들과는 극단적인 대립관계를 노정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국 상황에서는 유중교 계열의 화서학파 인물들이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전면에 투신했던 경향과는 처신의 방편을 달리해, 유기일 등과 함께 ‘자정수의(自靖守義)’의 입장을 견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서학파의 두 파 가운데 한 파인 중암 문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홍재구의 학문과 행적은 사상사 혹은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대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재구가 지은 시문의 대부분은 산일(散逸: 흩어져 없어짐)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서신류만이 강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현전하고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