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배모양의 주형 광배(舟形光背)가 놓여 있는 것으로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나,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었던 불상은 없어진 상태이다. 1967년 이 절터를 신축공사할 때 금동불상 1점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당시 절터 주변은 논과 밭으로 경작 중이었으며 주위에서 많은 와편들이 수습되었다. 현재는 1982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71년 지정),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71년 지정),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1971년 지정)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연화대좌로 상대, 중대, 하대의 3단으로 구성되었다. 하대는 팔각의 받침대와 복련석(覆蓮石)으로 이루어졌는데, 받침대에는 각 면에 아무런 문양이 장식되지 않은 안상(眼象)만 새겨져 있다. 복련은 복판중엽(複瓣重葉)으로 8엽을 돌렸으며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는 2단의 굄이 8각의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 역시 각 면에 감(龕)을 얕게 파고 그 안에 8구의 신장상(神將像) 등을 조각하여 장엄화하였다. 상대는 단판앙련(單瓣仰蓮)을 2단으로 쌓아 올렸으며 각 연판 안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화려하고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대좌 형식은 9세기의 통일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과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에서 볼 수 있다.
광배는 불상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형의 거신광(擧身光)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 안쪽에 2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다시 구획하였다. 두광은 중앙에 활짝 핀 연꽃과 같은 연화문으로 표현한 데에 반하여 신광에는 아무런 문양도 시문하지 않았다. 두광과 신광 안쪽에는 넝쿨무늬로 장식하고 바깥쪽에는 불꽃무늬를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광배 정상에는 화불(化佛) 1구가 조각되었고 그 아래로 좌우에 화불 8구가 서로 마주보게끔 배치되어 있다. 9구의 화불은 원형의 신광과 두광을 갖추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거의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지만, 손의 형태가 합장인(合掌印), 선정인(禪定印), 여원인(與願印) 등을 하고 있어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이러한 광배 형식 역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영주 북지리 석조불좌상,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 9세기경 통일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홍천 물걸리 대좌 및 광배는 양식적으로 볼 때 한 짝으로 조성되었으며 전각에 함께 안치되어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상과 석조여래좌상, 석조대좌와도 대좌 형식이나 특징이 거의 유사하여 같은 시기인 9세기경의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