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왜적은 조총으로 초기의 전세를 주도하였다.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는 이에 대응하고자 조총청(鳥銃廳)을 만들어 총포 제작을 시도하였다.
광해군 때 청나라의 세력이 급진적으로 확대되자, 북호(北胡)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총포 제작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건의가 이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1614년(광해군 6) 7월 14일 조총청이 화기도감으로 개칭되었다. 소속 관원은 도제조 1인, 제조 5인, 도청(都廳) 1인, 낭청(郎廳) 좌우 각각 2인씩이다.
도제조는 영의정이 겸임하고 제조는 정2품 이상의 고위직이 맡았다. 설치 당시 도제조로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제수되었다. 제조는 유근(柳根)·박승종(朴承宗)·이상의(李尙毅)·이수일(李守一)·이경량(李慶梁)이, 도청에는 유희량(柳希亮)이 임명되었다.
화기도감에서 제작한 화포의 종류로 동철로 만든 불랑기(佛狼機)·현자총(玄字銃)·백자총(百字銃)이 있고, 또 정철(正鐵)로 만든 삼안총(三眼銃)·소승자장가(小勝字粧家)·쾌창(快鎗) 등이 있다.
초기에는 화기 제조의 기술과 경험 부족 등으로 제조 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불랑기를 제조할 때, 1614년 7월 15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3월 14일 완성한 것으로 보아 8개월이나 소요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기는 비변사의 방어 계획과 화기수급 계획에 따라 각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한성 부근에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치영(緇營), 각 도의 병사아문(兵事衙門)을 비롯하여 우후(虞候)·만호(萬戶)·중군(中軍) 등이 수비하는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화기도감은 1615년 4월 29일 1차 업무를 마친 뒤 별다른 역할이 없다가, 1904년 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군기창(軍器廠)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