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군 이연 신도비 ( )

목차
관련 정보
화산군 이연 신도비
화산군 이연 신도비
서예
유적
국가유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조선후기 종실인사 화산군 이연의 신도비.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화산군 이연 신도비(花山君 李? 神道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서울특별시
종목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유산(1980년 06월 11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75-122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조선후기 종실인사 화산군 이연의 신도비.
내용

1747년(영조 23) 건립. 총 높이 495㎝, 비신의 높이 295㎝, 너비 104㎝, 두께 62㎝. 198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현재 일대가 주택가로 변하여 묘는 이장되었고, 신도비와 문인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첨석[檐石:처맛돌]을 얹었는데, 귀부는 비신에 비해 크고 둔중하지만 당시의 석비 조각으로는 우수한 편이며, 첨석의 용마루 · 처마 · 공포 조각도 섬세하다.

화산군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손자로 부친은 해원군(海原君) 이건(李健)인데, 숙부 해양군(海陽君) 이희(李僖)가 아들이 없자 그의 가계를 이었다. 사망 후 1726년(영조 2)에 현록대부(顯祿大夫)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官)에 추증되었고, 1746년에는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그의 효행을 임금에게 아뢰자 효간(孝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비문은 송인명이 지었고, 글씨는 조카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조선화된 송설체(松雪體)풍으로 썼으며, 두전(頭篆)은 아들 낙창군(洛昌君) 이당(李檔)이 썼다. 비문에는 화산군의 가계(家系)와 성장과정 및 효성과 우애가 깊은 성품과 그의 행적이 적혀 있으며, 뒤쪽에는 세 아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 낙창군((洛昌君) 이당(李樘) ·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을 비롯한 자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서울금석문대관』(서울특별시, 1987)
『서울문화재대관』(서울특별시, 1987)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