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서원은 1695년(숙종 21)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하여 문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1716년 어필로 사액되어 전국 서원 가운데 가장 권력이 막강하였다.
당시 척불숭유의 정책으로 유학이 국교가 된 뒤, 유림의 권력은 막강하였으며, 그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의 횡포는 늘어만 갔다. 화양서원에서 검은 도장을 찍어 발행하는 공한은 당초 서원의 업무를 유지, 관리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문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세력이 서원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뒤부터 화양묵패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화양서원의 세력은 당시 국가 권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고, 한번 묵패가 발행되면 지방의 수령이라도 거역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묵패는 서원의 제수(祭需) 비용에 충당한다는 구실 아래 착취와 토색질에 쓰여서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을 괴롭혔다. 일단 묵패를 받게 되면 사유야 어떠하든 논밭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고, 만일 지시를 어길 때는 서원 뜰로 끌려가서 요구된 금품이 마련될 때까지 감금당하거나 사형(私刑)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화양묵패는 협박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불법무도한 행위를 막고자 대원군 이전에도 화양서원을 비롯한 다른 서원을 가끔 단속했으나, 폐단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1858년(철종 9) 7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으로 우선 화양서원의 복주촌(福酒村)을 영구히 철폐하라는 영이 내려졌다.
주호(酒戶)에도 불가침의 특전이 주어져서 돈푼이나 있는 요역(徭役) 기피자들이 모여들어 피신했기 때문에 국가는 그만큼 재정 수입이나 공사에서 손해를 보았다. 여기에 가난한 백성들이 역을 대신 지게 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화양서원을 훼철하고 선비들의 모임을 금지하여 묵패의 횡포를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