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

신부성적/김은호
신부성적/김은호
의생활
개념
연지 · 분 등을 바르고 매만져 얼굴을 곱게 꾸미는 치장행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연지 · 분 등을 바르고 매만져 얼굴을 곱게 꾸미는 치장행위.
개설

법규상의 의미는 인체를 청결하게 하거나 미화하는 행위이나, 실제로는 아름다운 부분을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하거나 위장하는 수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화장이라는 낱말은 가화(假化)·가식(假飾)의 의미를 내포한다. 본디 화장이라는 낱말은 우리 나라의 고유어가 아니며, 일본으로부터 개화기 이후에 도입된 말이다. 고려시대에 화장이라는 낱말이 쓰인 적이 있기는 하되, 화장(化粧)이 아닌 화장(化裝)이라고 표기하였다.

이와 비슷한 단어로는 야용(冶容)이 있는데, 이것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 억지로 아름답게 꾸민다는 분장(扮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화장을 기초화장과 색채화장으로 대별한다면 야용은 색채화장에 해당된다.

이 밖에 우리 나라의 고유용어로는 장식(粧飾) 또는 단장(端粧)이 있다. 이 낱말들은 화장품에 의한 피부손질과 아름다움가꾸기·장신구·옷치장 따위를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 장식은 화려한 것일 때, 단장은 수수한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관습이 있다.

또 이를 세분하여 피부손질 위주의 담박한 멋내기는 담장(淡粧)이라고 하였고, 이보다 색채를 곁들여 멋들어지게 치장한 경우는 농장(濃粧), 짙은 화장이되 요염한 꾸밈일 때에는 염장(艶粧)이라고 하였다.

또한 짙은 화장이되 의식을 위한 화장, 예를 들면 혼례를 치르려는 신부의 그것은 응장(凝粧)이라고 하였다. 얼굴 중심의 치장이 아닌 옷치장과 몸치장마저 곁들였을 경우에는 성장(盛裝)이라고 하였는데, 특히 신부의 얼굴치장·옷치장·몸치장은 응장성식(凝粧盛飾)이라고 하여야 걸맞다.

그리고 미용(美容)은 얼굴가꾸기 행위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낱말의 세분화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미의식이 발달하였으며, 아울러 화장기술 역시 높은 수준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장품이라는 낱말도 화장이라는 낱말과 함께 유행된 것으로서, 그 이전에는 지분(脂粉:연지와 백분) 또는 분대(粉黛:백분과 눈썹먹)가 주로 쓰였으며, 화장품과 화장도구 일체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장렴(粧匲)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화장의 기원

화장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인체의 아름다운 부분은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 혹은 위장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인간생래의 본능이라는 본능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밖에 신분·계급·종족·성별을 구별하기 위한 치장이 미화수단으로 발전하였다는 신분표시설, 자신을 위장 혹은 은폐시키기 위한 치장이 미화수단으로 발전하였다는 보호설이 있다.

또 신에게 경배 혹은 기도하기 위하여 향나무 가지를 사르고 향나무(잎)의 즙을 바르던 행위가 미화수단으로 발전하였다는 종교설 등이 있는데, 어떤 시각에서 보거나 화장의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화장의 기원이 이처럼 오래됨에도 불구하고, 현대개념의 화장이 정립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된 현상이다.

그렇지만, 화장이 순수한 아름다움의 추구수단이기보다는 종교의식에 필요한 치장 또는 치료행위의 일부였고, 산 사람이 아닌 사체(死體)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장은 종교·의학·약학·과학 따위와 혼합되어 있었고, 주술수단 또는 신분표시수단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17세기부터 변모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화장이 독립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미개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초현대사회에서마저 화장행위를 또렷하게 구분짓기 어려운 점이 적지않다.

역사

상고시대의 화장

단군신화에 의하면, 한민족의 첫 주거지가 단목(檀木:박달나무) 근처라고 하는바, 이는 향나무인 박달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등 향료가 생활과 밀접하였음을 의미한다(물론 향료를 이 당시에 화장재료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또 고조선시대에는 피부미백수단이 강구된 듯하다. 쑥과 마늘은 양념인 동시에 약재이기도 하지만 피부를 희게 하는 미용재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얼마 전까지 민간에서 널리 행하여진 미용처방을 보면, 쑥을 달인 물에 목욕함으로써 피부를 건강하게 함과 아울러 희어지기를 기대하였다. 짓찧은 마늘을 꿀에 섞어 얼굴에 골고루 펴바른 뒤 씻어냄으로써 살갗의 미백효과 외에 잡티·기미·주근깨 등을 제거하도록 노력하였다.

따라서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사용하고 100일 동안 햇볕을 보지 말도록 한 것은 백색피부 가꾸기를 시험한 사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흰 피부의 소유자를 귀인(貴人)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이것은 고대의 백색피부 소유자를 숭상한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민족과 같은 샤머니즘 문화권인 야쿠트족의 창조신화를 보면 최초의 인간인 백인이 흰 산, 흰 나무, 흰 연못 근처에서 탄생한바, 한국인이 고대로부터 백색을 호상(好尙)한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쑥과 마늘이 미백용 미용재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열국시대에 읍루와 말갈에서 피부보호 및 백색피부 손질이 중시된 사실이 이와 같은 가정을 뒷받침하여 준다. 즉 한반도의 동북방에 거주하였던 읍루 사람들이 겨울에 돈지(豚脂:돼지기름)를 발라 추위를 견디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동상을 예방하는 돈지의 효능을 이용한 것이다.

또 말갈 사람들이 오줌으로 세수하였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오줌세수를 피부 미백수단으로 이용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색다른 미용법이라고 믿어진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들은 고조선 및 열국시대에 한반도와 한반도 주변 거주민들이 피부보호와 피부미용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증거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채협총(彩篋塚)에서 출토된 채화칠협(彩畫漆篋)의 그림이 있다. 채화칠협은 비록 낙랑유물이기는 하나 여기에 나타난 인물상이 머리가 정돈되어 있고, 이마를 넓히기 위하여 머리털을 뽑은 흔적이 뚜렷하고, 눈썹이 굵고 진하게 그려진 것으로 미루어 이 시대에 최소한 단정한 몸차림이 생활의 기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달리 치졸한 형태의 치장이 남부지방에서 성행하였던 것 같은데 마한 사람들이 가끔 문신을 하고, 변진의 남녀가 왜인(倭人)들처럼 문신을 하였다고 한다. 왜에서 적토분식(赤土粉飾)의 문신이 최초의 치장수단으로서 유행하였음에 비추어 남부지방의 마한·변진인의 문신 역시 원시화장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갖가지 치장이 순전히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후한서≫에 기록된 바로는 고조선 사람들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즐기고, 변관(辨冠:모자)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고조선사회의 경제·문화 수준이 이 정도였다면 문신 이상의 화장과 화장품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한편, 고대인의 생활유적지인 패총에서 원시 장신구가 출토되고 있다. 즉, 목이나 팔목·손가락에 끼거나 걸 수 있게 갈고 닦은 조개껍데기, 짐승의 뼈를 가공하여 줄줄이 꿰도록 한 것, 아름다운 돌을 가공한 것들이 있다. 가공한 미석(美石)은 곧 관옥(管玉)·곡옥(曲玉)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중국문헌인 ≪후한서≫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와 읍루에서 붉은 옥이 생산되었는데 부여의 그것은 대추만하다고 한 바 부여와 읍루 사람들이 이것을 장신구로 사용하였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마한 사람들은 둥근 옥[珠玉]을 좋아하여 옷에 장식하기도 하고, 이것을 꿰어 남자들이 상투를 틀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단정한 몸치장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삼국시대의 화장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화장술과 화장품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남아 있어 전시대보다는 윤곽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① 고구려고구려 사람들이 공사(公事)로 모일 적에 모두 비단과 금으로 장식하고, 특히 대가나 주부 등의 벼슬아치는 두건을 쓰며 소가는 절풍을 썼다.

또 모두 깨끗한 옷 입기를 좋아하며 밤이면 남녀가 여럿이 모여서 배우놀이와 음악을 즐겼다는 ≪후한서≫의 기록을 근거로 추리하면, 고구려인들은 신분과 직업에 따라 각기 다른 치장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악공(樂工)과 무녀(舞女)가 이마에 연지화장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5, 6세기경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수산리벽화의 귀부인상을 보면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며 뺨과 입술이 연지로 단장되어 있다. 쌍영총 벽화의 여인상도 연지화장을 하고 있는데, 수산리벽화의 주인공은 귀부인이고 쌍영총 벽화의 주인공은 여관(女官) 혹은 시녀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연지화장을 한 모습이다.

고분벽화에 나타난 고구려 여인의 두발형태는, 머리카락을 뒷머리부터 앞머리로 감아올려 끝 머리를 앞머리 가운데에 감아 꽂아 얹은 머리, 뒤통수에 낮게 머리를 튼 쪽머리, 양쪽 귀 옆에 머리카락의 일부를 늘어뜨리는 푼기명머리, 뒷머리에 낮게 머리카락을 묶는 중발머리로 요약된다.

② 백제: 일본의 옛 문헌인 ≪삼재도회 三才圖會≫에 일본 사람들은 화장할 줄 모르고 화장품도 만들 줄 몰랐으나 백제로부터 화장품의 제조기술과 화장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백제 사람들의 화장술과 화장품의 제조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백제 사람들이 사용한 화장품의 종류라든지 화장술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힌 기록은 없고, 지극히 한정된 내용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백제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길고 아름답게 가꾼 마한의 전통을 계승하여 남자는 상투를 틀었고, 여자의 경우 부인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틀어올린 쪽머리를 하고, 처녀는 두 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댕기머리를 하였다. 백제 사람들은 두발형뿐만 아니라 옷치장과 화장 역시 신분에 따라 달리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제 사람들의 화장경향은 시분무주(施粉無朱:분은 바르되 연지를 바르지 않음)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표현은 중국문헌에 나타난 것이어서 중국여인의 화장경향과 대비한 것이고 보면, 백제사람들이 엷고 은은한 화장을 좋아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③ 신라: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사람들의 화장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여인들이 가체(加髢:다리)를 사용하였는데 금은주옥과 오색비단으로 꾸몄다고 한다.

고구려의 관나부인(貫那夫人)의 머리카락 길이가 9자였다고 하는 바 옛날에는 보편적으로 장발이 미인의 요건이었다. 신라의 다리 사용은 장발의 처리기술이 발달한 것으로서 신라사람의 뛰어난 미의식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신라사람의 가체는 중국의 가체보다 장발이고 미발(美髮)이어서 중국여인들이 매우 탐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국가간 교역품으로 여러 차례 보내졌으며 상인들에 의해서 수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신라인의 화장기술 및 화장품 제조기술이 중국보다 우수하였음을 입증한다.

신라제 가체가 중국제 가체보다 미발이었던 까닭은 동백·아주까리·수유의 열매로 머릿기름을 제조하여 머리손질을 하였고, 또 유두일 민속이 있어서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자주 감은 때문이라고 믿어진다(세발의 중시는 신라시대 유두일에 한정되지 않고 조선시대까지 확산, 전승되었다).

신라시대에는 백분(白粉)의 사용과 제조기술이 상당하였다. 한 승려가 692년(효소왕 1)에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들었으므로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라에서는 692년 이전에 연분의 제조가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래의 백분(白粉)은 분(粉)자가 쌀[米]의 가루[分]를 의미하는 바와 같이 쌀·서속 등 곡식의 분말 혹은 분꽃씨의 분말, 조개껍데기를 태워 빻은 분말, 백토(白土)·활석의 분말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재료로 만들어진 백분은 부착력과 퍼짐성이 약하여, 분을 바르기 전에 족집게나 실면도로 안면의 솜털을 일일이 뽑은 뒤, 백분을 물에 개어 바르고 나서 잠시(20∼30분) 잠을 자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할 뿐 아니라 곱게 발라지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백분에 납[鉛]을 화학처리함으로써 부착력이 좋아지고 잘 펴바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연분의 제조는 화장품의 발달사상 획기적인 대발명으로 평가된다.

신라인들은 또 연지를 만들어 볼과 입술을 치장하였는데, 연지는 홍화(紅花:잇꽃)로 만든 것이었다. 연지 외에 미묵(眉墨)이 있었는데, 이는 나뭇결이 단단한 굴참나무·너도밤나무 따위의 나뭇재를 유연(油煙)에 개어 만들며, 눈썹 그리기에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신라사람들은 향수와 향료를 만들어 애용하였다. 향수(향료를 알코올에 용해시킨 요즘의 향수와는 다름)는 향내나는 물질을 압착시켜 얻은 것이거나, 향기 짙은 꽃잎을 기름에 재어 얻은 화정유(花精油), 동식물 및 광물질을 기름에 용해시킨 향유(香油) 등이었다.

이 향수는 제조와 보관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조합향수에 비하여 향내가 훨씬 여리기 때문에 향수의 사용과 아울러 향료의 사용이 많았다.

향기 짙은 식물의 줄기나 잎·뿌리 따위를 그늘에서 말려 가루낸 것, 혹은 향나무를 잘게 토막낸 것, 광물·동물의 일부를 고형 혹은 분말형태로 제조한 향료는 향수보다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향로에 향료를 살라 연기를 내는 것이다. 또 향료를 주머니에 담은 향낭(香囊)을 옷고름 혹은 허리춤에 찼는데, 신라에서는 남녀노소가 귀천에 구애없이 패용하였다고 한다.

신라사람들은 종교·제사의식을 위하여 향수·향료를 사용하는 외에 기도할 때와 맹세할 때, 부부침실에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향을 복용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792년(원성왕 8) 7월에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그녀의 몸에서 향내가 났다는 것이다. 신라사람들의 애향관습은 향이 의식을 위한 필수품이었고, 향내의 발산을 멋내기 수단으로 삼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신라사람들은 자주 목욕하였고, 목욕할 때마다 사용하게 마련인 청정품(淸淨品), 즉 조두(澡豆)가 날곡식으로 만든 것이어서, 조두의 사용으로 인한 날비린내를 가시게 하기 위하여 향료의 사용이 불가피하였던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신라사람의 장신구 역시 매우 다양한 동시에 화려하였다. 금·은·옥 외에 대모·상아·청동 혹은 나무로 귀걸이·목걸이·가락지·팔찌를 만들어 장식하고, 허리띠에도 갖가지 장신구를 덧달아 장식함으로써 멋을 살렸다.

이와 같이 신라시대에 높은 수준의 여러 가지 화장품이 개발되고 고도의 화장기술이 존재한 배경에는 신라사람의 남다른 미의식, 즉 영육일치사상(靈肉一致思想)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부(部) 촌장(村長)의 추대로 신라의 첫 임금이 된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용모단정하고 아름답게 생긴 남자였다. 그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한다.

또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閼英)의 몸매와 얼굴모습이 남달리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은 결점이 있어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완벽한 미인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첫 임금과 왕비에 관한 이 기록은 신라사람들이 지혜와 용기, 미모를 겸비한 남녀라야 지도자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박혁거세가 목욕수단을 통하여 지도자의 요건을 강화하고, 알영 역시 목욕수단(두 사람 모두 단순한 목욕이 아니라 화장 혹은 분장을 하였거나 알영의 경우 외과수술을 통하여 가다듬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어진다)을 통하여 미인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또 300여 낭도의 우두머리인 원화(源花)도 아름다운 여자를 가려 뽑았다. 그러나 원화인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 시샘 끝에 살인하는 불상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폐지된후, 아름다운 여자를 대신하여 우두머리로 선발된 화랑(花郎) 역시 아름다운 남자였다. 화랑은 미소년이어야 하였는데, 여기에 장식(粧飾)을 더하였다.

기록된 바로는 ‘미모남자장식(美貌男子粧飾)’의 내용은 아름다운 색깔의 옷차림에 귀고리를 하고, 분을 바르고, 구슬이 장식된 모자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명산대찰을 순례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하는 단체의 우두머리가 미녀이거나 미남으로서 아름답게 치장까지 해야 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미 박혁거세와 알영의 고사가 시사하듯이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의 발현이라고 믿어진다. 이로 인하여 신라시대의 사람들은 깨끗한 몸과 단정한 옷차림을 추구하였고 아름답게 치장하였는데, 이와 같은 미의식의 발현 때문에 화장품과 화장술의 발달이 뒤따르게 되었다.

또한 불교의 신라 전래와 신라사람의 불교 신봉이 화장과 화장품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불교의 교리가 향을 신성시하고, 종교의식에 향을 반드시 사용하는 점, 그리고 목욕재계를 중시하는 사상으로 인하여 향의 대중화와 목욕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불교의 신봉은 비단 신라에서만이 아니고 백제·고구려에서도 행하여졌지만, 특히 신라에서는 목욕재계 중시로 인하여 청결관념이 강화되었다.

즉 목욕을 자주하여 몸을 깨끗이 하여야만 마음도 정결해진다는 사상으로 발전된 것이다. 신라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기본적인 미의식에 종교(불교)교리가 뒷받침되어 심신(心身)을 동시에 청결하게 하고자 절간에는 물론 가정에도 목욕시설을 구비하였다.

이에 따라 목욕용품이 발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팥·녹두·쌀겨 따위로 만든 조두를 들 수 있다. 신라인의 이와 같은 목욕재계관념은 목욕을 자주 하게 하는 외에 목욕에 대한 관념까지 변화하게 만들었다.

목욕이 몸을 깨끗하게 하고 더러움을 씻는 단순한 청결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죄악을 씻는 신성한 의식수단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사찰행사뿐만 아니라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필요로 하는 행사와 기원행위를 하기 전에 반드시 목욕하는 관습을 가져왔다. 이와 아울러 향을 이용함으로써 열반의 경지에 이르리라는 불교의 영향으로 향이 애용되었다.

불교는 특정인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제를 표방하여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의 구애없이 신자로 포용하였기 때문에 향수·향료는 신라인 모두가 사용하게 되었다.

다만 고급인가 저급인가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신라사람들의 향 애용관습이 매우 광범위해졌다. 이미 설명한 사례 외에도 질병치료(눌지왕의 왕녀를 치료한 일이 있음)와 음식에마저 향신료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화장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화장과 화장품이 어떻게 변화하였는 지 확연히 구분지을 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통일 이전에 엷은 화장 위주의 화장경향이 통일 이후에는 다소 화려해진 듯하다.

예를 들면, 귀족인 김유신(金庾信)의 누이 문희(文姬)가 엷은 화장, 즉 담장을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통일 이전의 화장경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664년(문무왕 4)에 부인의 복제(服制)를 중국식으로 바꾸라는 왕명이 내렸는데 그 이후에는 화려해졌을 것이다.

이것은 중국과 신라의 문물교류가 빈번해졌음을 의미하는 바 당시 중국의 여인들이 짙은 색조의 화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의상과 아울러 화장도 변화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통일 이후 정국이 안정되고 문물이 융성해져 일상생활이 자못 사치해졌기 때문에 화장 역시 사치해졌을 것이다.

신라의 한 승려가 692년에 일본에서 연분을 제조할 만큼 신라에서는 이미 연분의 제조기술이 보편화되어 있었으며, 고관은 나들이할 때 화려한 복장의 소년·소녀가 향화(香火)를 받들었고, 화랑의 치장으로도 입증되듯이 남자들 역시 멋내기에 열중하였던 것 같다.

현재 출토된 화려한 장신구들이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지고 사용된 것들인데 이를 보더라도 신라사람의 치장은 매우 화려하였다. 그런데 신라사람의 치장은 의상·장신구·화장 등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 깨끗하고 양심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자 노력하였다. 영육일치, 곧 심신이 일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화장

고려시대의 화장과 화장품의 개발은 신라의 화장문화가 전승, 발전된 것이었다. 고려 태조가 신라의 정치·문화 제도와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게다가, 종교 역시 불교를 계속 신봉하였고, 신라 초기에 생성된 미의식인 영육일치사상이 이어졌다. 그 결과 고려의 화장문화는 외형상 사치해졌고, 내면상으로는 탐미주의(耽美主義) 색채가 농후해졌다.

목욕의 경우를 보면, 청결관념이 더욱 강조되어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목격하여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기록한 바와 같이, 남녀가 한 개울에서 한데 어울려 목욕하고, 하루에 서너 차례나 목욕할 만큼 깨끗한 신체를 간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흰 피부로 가꾸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강구되었는데, 전신목욕이 성행하고 부유층에서는 갓난아이 적에 복숭아 꽃물에 목욕시키기도 하였다. 부유층의 여자들은 난탕(蘭湯), 즉 향수에 목욕하기도 하였다.

≪고려도경≫에는 고려 귀부인의 화장에 대하여, 향유(香油) 바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분은 바르되 연지를 즐겨 바르지 않았으며, 눈썹은 넓게 그리고, 검은 비단으로 만든 너울을 쓰고, 감람(橄欖) 빛깔의 넓은 허리띠를 두르고 채색한 끈에 금방울을 달고, 비단 향낭을 여럿 차는데, 향낭을 여러 개 패용할수록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긍의 이 기록은 중국인의 눈에 비친 것으로서, 중국의 화려한 색채화장과 대비한 표현임을 감안한다면, 통일신라시대에 우리 고유의 엷고 우아한 화장이 다소 중국화하였다고 하지만, 기본은 고려시대에도 거의 변함이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재가승(在家僧)의 출가법 팔계재(出家法八戒齋) 가운데 도식향만(塗飾香鬘)·불착화영락(不著華瓔珞)·불향도신(不香塗身)·불착향훈의(不著香薰衣) 등의 항목이 있고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워진 경향이 고려시대에 일부나마 더욱 사치스러워져, 이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일부 계층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신체와 머리카락·옷에 향료를 뿌리거나 발랐으며, 옷에 향내를 스미게 하였고, 갖가지 보석 장신구를 패용하고, 여러 가지 화장품을 겹겹이 진하게 바르기도 하였기 때문에, 일부 사찰에서는 이러한 차림의 신자들에게 출입을 금지시킨 예도 있다.

고려 여인들의 화장경향에 대한 서긍의 표현과 출가법 팔계재에 나타난 그것이 이처럼 다른 까닭은 고려 여인들의 치장이 신분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기생 중심의 분대화장(粉黛化粧)을 들 수 있다. 분대화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분을 도포하듯이 하얗게 많이 바르고, 눈썹을 가늘게 가다듬어 또렷하게 그리고, 머릿기름은 반질거릴 만큼 많이 바르는 특징이 있다.

기생을 분대라고 별칭할 만큼 기생들이 판에 박은 듯 한결같이 분대화장을 하였는데, 고려 초기에 교방(敎坊)에서 기생이 훈련되고 분대화장법도 교육됨으로써 분대화장은 기생이라는 직업여성의 상징이 된 바 진하고 야한 화장을 으레 분대라고 부르는 의미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에서 나아가 진하거나 야한 화장을 한 여인들, 즉 궁녀나 미인(화장한 여인이라는 뜻) 역시 분대라고 별칭하게 되었는데, 고려 기생의 분대화장형태는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신분별 화장형태가 무너져, 궁녀·기생 등 직업여성과 비직업여성으로 대별되었다.

즉 여염의 규수나 부인들은 평상시에는 화장하지 않고 연회나 나들이 때에만 화장함으로써 애써 직업여성으로 오해받지 않으려고 분대화장을 기피한 까닭에 분대화장은 더욱 기생의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직업여성 위주의 분대화장류의 화장과 여염여자들의 비분대화장류, 즉 엷디 엷은 화장으로 이원화되었는데, 그것은 고려 초기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 특기할 사항은 면약(面藥)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과 염모(染毛)가 시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송나라의 정사·부사·도할관·제할관의 자리에 은제(銀製) 면약호(面藥壺)를 두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구리로 만든 면약호를 두었는데, 면약호의 생김새는 둥근 배에 목이 길며 뚜껑이 다소 뾰족하다고 하며, 높이는 5치, 배의 지름은 3치5푼, 용량은 한 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크기와 생김새로 보아 면약은 여자 외에 남자들도 항시 사용하는 안면용 액상(液狀)의 화장품으로 추측된다. 즉 요즘 로션에 해당하는 피부미백제 겸 보호제였던 듯하다. 또 고려 말엽에 읊어진 사설시조 중에 “백발에 센(흰)머리에 흑(黑)칠하고 태산준령으로 허위허위 넘어간다……”(이 시조는 조선 초기의 작품이라고도 함) 하는 구절로 미루어볼 때, 머리 염색이 서민사회에까지 확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 공장(工匠)에는 소장(梳匠)과 경장(鏡匠)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화장의 기본도구인 빗과 거울을 양산하기 위한 조처로서, 화장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화장품제조 기술자도 따로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면약의 사용이 적지 않은 동시에 기생용 분대의 소비량이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화장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사치와 퇴폐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 근검·절약이 강조되고, 사치스러운 옷차림과 장신구 화장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린 바 이로 인하여 일반인의 평상시의 치장이 고려시대에 비하여 훨씬 담박하여졌다.

그것은 조선시대 지배층의 생활사상 탓도 있지만, 기생과 궁녀 등 직업여성들이 분대화장한 데 대한 기피관념 때문에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산업구조가 복구되지 못하여 전반적으로 경제적인 곤란을 겪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화장품산업도 많은 타격을 받았다.

임진왜란 직후에, 일본에서 아사노쓰유(朝の露)라는 상표명의 화장수(化粧水)가 발매되었는데, 광고문안의 서두가 “조선의 최신 제법으로 제조된 아사노쓰유 화장수는……”이고 보면,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에서는 고도의 기술로 화장품이 제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수 외에도 여러 가지 화장품의 수준이 높았을 것이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오히려 여느 산업과 마찬가지로 퇴보하였다.

이상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삼국시대에 생성되어 우리 고유의 미의식이 되다시피 한 영육일치사상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외형상 크게 변모한다. 신체가 정결하여야 마음도 정결하다는 사상, 즉 내면의 미와 외면의 미가 동일하다는 사상으로 바뀐 것이다.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분바르고 연지를 그리되, 본래의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였으며, 화장한 모습이 화장 전보다 확연하게 달라 보이면 야용이라고 경멸하였다.

그러나 누구든지 깨끗한 옷에 정결한 신체를 간직하기 위하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빗질하였으며, 외출하였다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손발을 씻는 등 청결하면서도 단정한 몸가짐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여기에서 진일보하여 그 사람의 외모를 보고 내면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며 올바른 마음가짐을 강조하였다. 즉 조선시대에는 지(智)·덕(德)·체(體)의 합일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이 내면의 미와 외면의 미를 동일시하는 상황 아래에서는 피부의 청결을 중시하게 되고, 피부를 정결하게 하는 목욕을 자주 하게 된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항시 어느 곳에서나 의관(衣冠)을 정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벌거벗은 채로 목욕하기를 꺼렸다.

개화기에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나 여행자들의 기록에 조선인들이 자주 목욕하지 않아 더럽다고 표현되어 있는 바 이는 그들이 동행한 사람들이 머슴 신분이며, 외국인과 여행하는 처지에서 벌거숭이 목욕을 할 수 없었으므로 목욕하지 않은 것으로, 그들의 기록을 근거로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불결하였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봉제사하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였으므로 자주 목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대부들은 부부가 침실에 들기 전에도 반드시 목욕재계하였다. 사대부 계층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난탕에 목욕하기도 하고 삼탕(蔘湯:인삼 잎을 달인 물)에 목욕하기도 하였다.

또한 흰 피부를 호상하였다. 백색피부 호상은 조선시대에 생겨난 관념이 아니라 일찍이 고조선시대에 비롯된 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흴 뿐만 아니라 기미·주근깨·흉터가 없고 투명한 피부, 즉 옥 같은 피부이기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피부로 가꾸기 위하여 미안수(요즘의 로션)를 만들어 사용하고, 꿀 찌꺼기를 펴발랐다가 일정 시간 후에 떼어내는 미안법(요즘의 팩)을 하는가 하면, 손쉬운 방법으로 오이꼭지를 안면에 문지르기도 하였다.

백색피부 호상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여서 분세수를 하였다. 또 남자들도 향낭을 패용하였는데 벼슬아치, 특히 승지의 향낭 패용은 의무사항이었다. 조선시대의 남녀는 평상시에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엷은 색조의 담장을 주로 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 지배층의 생활사상 외에 기생·궁녀들이 분대화장한 데 대한 기피에서 더욱 촉진되었다.

그러나 혼례·수연·궁중연회 및 나들이 등 의식을 위한 옷차림과 화장은 자못 성대하여 오히려 고려시대보다 사치스러웠다.

화려한 활옷, 보석 댕기판과 비녀, 그리고 떨잠·뒤꽂이·가체 등 머리 장식이 요란하고 족두리나 화관을 썼으며, 노리개는 여럿을 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도(粧刀)·비녀·꽃신 등 한 개의 가격이 쌀 몇 섬에 해당하는 고가였으나 재산을 기울여 장만하는 추세였다.

영조 때에는 가체가 성행하여 집값과 맞먹거나 그 이상인 경우가 많아, 사치를 억제하기 위하여 가체를 금지하는 대신 화관이나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화관과 족두리에 금은 주옥 및 칠보·파란을 장식하여 오히려 사치가 더해지고, 가격이 더 비싸졌음에도 금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사치는 의식을 위한 치레 경우이고, 평상시에는 맑고 깨끗한 옷차림과 단정한 몸가짐으로 생활하였다.

조선시대의 화장품 종류와 화장에 대한 관념은 ≪여용국전 女容國傳≫이라는 소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여성용 화장품과 화장도구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쓴 소설로, 거울·족집게·모시실·수건·경대·세숫대야 등의 화장도구와 분·연지·머릿기름·밀기름·향·미안수 따위의 화장품 20여 종이 등장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여용국이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중 여황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자 마음을 고쳐먹은 황제가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도록 독려하였더니, 여용국이 예전처럼 화평을 되찾아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여인이 게으름을 피운 결과 얼굴에 때가 끼고 머리카락에 이가 득실거리는 등 보기 흉해지자, 추한 자신의 얼굴에 놀란 여인이 마음을 고쳐 화장품과 화장구로 용모를 가다듬어 예전처럼 아름다워졌다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서, 여인의 미용이 황제의 정사만큼 중요함을 뭇 여성들에게 계도시키고 있다.

이러한 화장품과 화장도구들은 가게에서 판매되는 한편, 방물장수들이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팔았다. 숙종 연간에 매분구(賣粉嫗)의 존재 사실을 밝히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매분구란 요즘의 방문판매원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또한 서울의 육주비전 가운데에는 분전(粉廛)이 있었다. 분전은 분만을 취급하는 전문가게가 아니라 화장품 가게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경장 및 소장의 관장(官匠)이 존재한 외에, 분장(粉匠)과 향장(香匠)이 따로 있었다. 이 분장은 주로 궁중의 여인용 분과 기생용 분 등을 제조하였는데, 분만을 제조하였는지 분과 아울러 연지·머릿기름 따위도 제조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장이 유명무실화하고 사장(私匠)이 대두함으로써 화장품의 제조가 확대된 듯하다. 일부 지방에서는 연지만을 파는 연지가게도 있었다.

그러나 개화기에 우리 나라를 여행한 선교사 및 여행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화장품가게가 아주 빈약하였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분전에서 화장품과 화장도구 일체를 취급한 것이 아니라, 장도는 도자전, 다리는 다리전에서 따로 취급하는 등 구분되어 있었다.

가게 외에 주로 여인들이 매분구 행상으로 판매하는 예가 더 많았고, 보상(속칭 방물장수)들도 적지 않았는데, 보상들은 화장품과 화장도구 외에도 여성용 생활소품을 아울러 취급하였다.

이들 행상은 다른 상인과 마찬가지로 천민층이었고, 일부 매분구들은 매신(賣身)을 겸하고 뚜쟁이 노릇까지 한 예도 있어 천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당패들이 분파는 일을 겸하는 바람에 매분구가 더욱 질시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이 무렵의 화장품은 대부분 가내수공업 규모로 제조되었으며, 제조장소나 제조자가 표시되지 않고, 상표 따위는 물론 없었으며 포장도 없다시피 하였다.

일정량의 화장품에 정가가 표시되지도 않았으며, 소비자가 주문하는 만큼 덜어 팔기 예사였다. 용기는 대부분이 사기였다.

상품으로 제조되었더라도 상품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오늘날 쌀에 상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모든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화장품을 구매하였던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대가족이 집단거주하여, 필요로 하는 술을 직접 제조하였듯이, 화장품 역시 자가생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웬만한 양반가에서는 화장품을 직접 제조, 사용하였다. 대가(大家)에서는 연지·백분·머릿기름·향료 따위의 자가제조를 당연시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화장품의 제조가 비교적 용이한 이유도 있었다.

개화기의 화장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경제정책이 자가자급경제(自家自給經濟)를 위주로 하여, 제조기술이 진보하였더라도 상품화가 진전되지 못한 예가 많았다. 화장품도 그 중의 한 예였다. 이 때문에 개항 이후 외국의 갖가지 신상품이 유입되자 재래상품들은 시장에서 밀리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외국에서 수입 혹은 밀수입된 화장품들이 재래상품에 비하여 비교가 안 될 만큼 포장이 미려하고 사용법 또한 간편하여 수입되자마자 대환영을 받았다.

개항 이후 초기에는 주로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유입되었으나, 1920년대에는 유럽(주로 프랑스) 방면으로도 확대되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화장품을 보면 주로 크림·백분·비누·향수 등이었다.

이 화장품들은 대량소비되는 것인 동시에, 재래 화장품에 비하여 포장과 품질이 우수하고 사용법이 훨씬 간편하였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이와 같은 수입화장품의 인기는 우리 나라 화장품 산업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1916년에 서울 종로 연지동에서 가내수공업 규모로 제조되기 시작한 박가분(朴家粉)은 원래 포목전문인 박승직상점에서 덤으로 주던 것인데, 품질개량과 포장개선을 꾀하여 1922년에 정식으로 제조허가를 받았다. 이 박가분은 외제백분에 비하여 품질이 다소 뒤졌지만, 재래백분보다는 혁신적인 상품이어서 전국에 인기리에 판매되었다.

관허(官許) 제1호인 박가분이 성공하자 서가분·장가분 등 유사상품 외에 미용백분·서울분·설화분 등이 제조 발매되고, 배달기름(머릿기름)·연부액(미백로션)·유액(밀크로션)·연향유·밀기름 등도 잇따라 시판되었다. 이 화장품들은 제조기술과 포장이 이른바 신식화장품을 모방한 것이어서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이 무렵의 화장품은 요즘처럼 화장품의 기능이 세분되지 않고 있었다. 예를 들면, 1920년대에 동아부인상회에서 제조 발매한 ‘연부액’은 살갗을 부드럽게 하는 모범적인 부료(膚料)요 모범적인 수(水)크림으로서 미안수로 손등약으로 바르라 하였다.

‘겨울연부액’은 세수한 뒤 얼굴에, 일한 뒤 손등에, 분 바르기 전에, 얼굴 터진 데, 얼굴 기타 잡병에 바르도록 권하고 있으며, 조선부인약방의 ‘금강액’은 여드름·주근깨·마른버짐·어루러기에 특효약이라 하였다.

‘유백금강액’은 최량의 미백소로서 세안 후에 한 방울만 바르면 희고 고운 미인이 된다는 등 복합기능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문에 광고한 이상의 화장품 외에도 가내수공업 규모로 생산된 상표 없는 상품들이 여전히 판매되고 있었다. 좌상은 시장에서, 손수레행상들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고객이 원하는 양만큼 덜어서 판매하였다.

크림을 손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북을 둥둥 쳤기에 ‘동동구리므’라는 말이 생겨났다. 신식화장품과 아울러 신식화장법도 도입되었다.

신식화장법은 재래화장법에 비하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입술연지의 빛깔이 진해지고 향수의 향내와 비누의 향내가 강렬하여졌다. 따라서 이러한 화장에 퍼머머리를 하고 짧은 치마에 뾰족구두를 신고 양산을 받쳐든 차림이 신여성의 맵시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신여성의 이와 같은 차림이 기생 및 접대부에 의해 먼저 유행되고, 일부 신여성의 자유연애 예찬으로 빚어진 비난 때문에 여염여자들에게서는 반발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종래 기생 등 직업여성의 치레와 여염여자의 치레 구분이 더욱 심화된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의 화장

1945년 8·15광복을 맞아 화장품산업은 전환기를 맞이한다. 화장품의 생산과 판매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던 일본인들이 철수하게 됨으로써 화장품의 생산활동이 위축된다. 더욱이 종전 몇 년 전부터 물자의 부족을 겪은 터라 화장품 생산은 더욱 크게 위축되었다.

광복 이후 화장품 원료생산이 행해지지 않고, 수입도 용이하지 않아 일시적으로는 퇴보현상을 보였다. 1950년 6·25전쟁이 또다시 화장품산업을 위축시켰다. 반면에 수입화장품·밀수화장품·PX유출품의 범람이 가속되었다.

우리 나라의 화장품 생산활동은 이 때문에 1960년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었다. 화장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화장법의 변화보다 옷·장신구·두발형·신발 등 치레의 변화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일제 치하에서 창간된 신문·잡지들이 근대화 제창의 일환으로 이미 1920년대부터 서구식 화장법 소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화장품의 가장 큰 변화는 화장품의 기능이 세분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960년대 이후에는 바니싱 타입의 크림과 백분의 소비량이 격감한 반면에, 액상색분(파운데이션)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아울러 연지도 고형(스틱상)으로 변모하였으며 소비량의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제 화장품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활 필수품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화장품을 폄하하지 않고 있다. 화장품 산업이 정밀화학이자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식되어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국책산업으로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그 결과 두 나라의 화장품이 세계를 석권하다 시피하고 있다. 아시아지역에서 토착 화장품기업이 존재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와 일본뿐인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세계화의 가속화와 정보의 신속화, 그리고 여행의 자유화등으로 화장과 화장품의 시·공간 개념이 거의 사라졌다. 우리 나라에서 세계 각국의 유명화장품이 수입 판매되고 있다.

여행자의 휴대품(선호도 1위) 등으로 화장품의 시·공간 개념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인터넷과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화장의 시·공간 개념도 사라졌다. 따라서 우리 나라 여성들은 원하는 화장, 원하는 화장품을 언제든지 시도하게 되었다.

1999년에는 화장품법이 개정되어 화장품산업의 육성이 도모되는 한편, 기능성화장품의 개발이 촉진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여성들은 몇가지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백색피부 호상(好喪)이 여전하여 여름에 햇볕에 살갗을 그을리려 하지 않고 있으며(미백화장품의 판매가 여전히 많음) 입체화장은 젊은 여성 위주로 보급되고 있으며 중·장년층에서는 여전히 피부손질 위주(생래의 아름다움)로 화장하고 있다.

한편, 남성의 정용(整容) 개념이 꾸준히 확대되어 화장품의 소비량이 증가하고 있으며 두발용 및 전신용(全身用) 화장품의 소비량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풍속과 생활

우리 나라의 세시풍속에는 미용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일찍이 미용의 생활화가 행하여진 것이다. 정월 초하루에는 부인 및 소녀가 새옷을 입고 곱게 화장하는 세장(歲粧)을 한다. 하녀들도 이 날에는 세장을 하였는데, 안주인을 대신하여 사돈이나 친척집에 문안을 가야 하였기 때문이다.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동산에 올라 달맞이를 할 때에도 단장을 한다. 달맞이 때 몸가짐이 깨끗하면서도 단정해야만 소원이 이루어지지, 불결하면 오히려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달맞이 때 부녀자들이 단장을 다투어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대보름날에 행하여지는 다리밟기와 놋다리밟기(안동지방) 때에도 단장하는데, 특히 놋다리밟기에서는 공주로 선발된 예쁜 소녀를 단장시켰다. 삼짇날에 부녀자들이 들놀이할 때 봄 분위기에 맞추어 화사한 화장과 옷차림을 하였고, 단오에는 맵시있게 차리는 단오장(端午粧)을 한다.

또한 8월 한가위에는 흥겨운 분위기에 맞추어 부녀자들이 농장성복(濃粧盛服)하더라도 나무라지 않았다. 전라도 남해안지방에서는 추석날 밤에 곱게 단장하고 강강술래에 참여하였다. 중양절(重陽節)에 가을 산놀이·들놀이 때에도 단장하였다.

이 밖에 검고 윤기 나는 머릿결을 간직하기 위한 민속도 적지 않은데, 정월 상진일(上辰日)에 모발이 길어진다 하여 부녀자들이 반드시 세발하였고 삼짇날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단옷날에는 창포 삶은 물에 세발하였고, 유두일에도 동류수에 세발함으로써 미발(美髮)로 가꾸었다. 또 정월 상해일(上亥日)에 조두를 만들어 얼굴이 희도록 하였다.

우리나라 화장의 특징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이 백색피부를 호상하였고, 미남·미녀를 존숭(尊崇)하는 생활사상을 가진 때문에 아름다움과 청결을 중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삼국시대부터 화장과 화장품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화장경향은 줄곧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이었다.

까닭은 문화적·경제적 이유 등 여러 가지이지만, 두드러진 원인은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꾸는 미용에 주안을 둔 탓이었고, 전혀 딴판으로 변형시키는 미용을 경멸한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를 야용이라고 하는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도 저항감이 다소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때문에 깨끗하고 맑은 피부만으로도 훌륭한 미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들이할 때 반드시 화장을 포함한 정장을 하였다. 이 관습은 고구려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믿어지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공사(公事)에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금은주옥으로 치레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화장설화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유곽에 자주 출입하는 남편이 화장한 아름다운 기생에 비하여 아내가 미워보이므로 소박을 결심하였다. 이에 아내가 일손을 멈추고, 머리 빗고 화장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고 나가고자 하였다.

마루에 앉아서 이 모습을 바라본 남편이 아내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 화해를 청하고 백년해로하였다고 한다. 이 설화에 의하면 소박당하는 극한 상황에서마저 나들이할 때처럼 화장하고 정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에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집안에서의 평상복과 나들이옷·신발을 따로 장만하며, 외출할 때의 옷차림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다. 또 신분·성별에 따라 옷차림과 장식·화장·두발형이 다른 예는 다른 나라에서도 두드러진 현상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고려시대부터 기생이 짙은 화장을 함으로써 직업여성은 야한 화장, 여염부녀자는 엷은 색조의 화장으로 이원화하는 고정관념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사고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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