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문(英文). 전라남도 광양 출생. 황재모(黃在模)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통분하고 황사중(黃士中)·한성순(韓性純)·고견(高堅)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1908년 포수 100여 명을 규합, 백운산(白雲山)에서 기병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어 모병함으로써 수백 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望德灣)에 일본선박 수십 척이 집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야밤에 기습공격하여 침몰시키고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다.
그 뒤 옥곡면(玉谷面)을 근거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또, 광주(光州)의 일본군 수비대본부를 기습공격하여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으나 많은 동지를 잃었고,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군자금 모금차 국내에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받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31년에 죽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