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황주(黃州). 자는 희적(希迪), 호는 월저(月渚). 평양 출신. 황세장(黃世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대림(黃大臨)이고, 아버지는 이천도호부사 황응성(黃應聖)이며, 어머니는 증 우윤 노운(盧澐)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 1625년(인조 3)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천거되고, 이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8년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황해도사·공조정랑·호조정랑·순천군수 등을 지낸 뒤 세자시강원과 사헌부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사관(史官)을 겸하기도 하였다. 특히, 세자시강원에 오래 있으면서 세자를 보도(輔導)한 공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구성부사로서 부원수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철옹성(鐵甕城)의 방어에 힘썼으며, 난이 끝난 뒤 백성들의 인심 수습에 공이 컸다. 뒤에 의주부윤에 올랐으며, 동부승지의 내명을 받고 죽었다.
장연부사로 있을 때 향시의 고관(考官)이 되어 세족(勢族)을 낙방시킨 일 때문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으며, 특히 구성부사로 있을 때에는 고려 때의 박서(朴犀)에 비유, 칭송되어 쌍비를 세워 그 덕을 기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