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서 출신.
본래 증산면 화선리 사람으로, 일을 보러 왔다가 1919년 3월 4일 최능현(崔能賢)·송현근(宋賢根) 등이 주동한 반석면 상사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날의 만세운동은 반석교회와 원장교회가 중심이 되어 계획하던 중 3월 2일 상사리 모락장[沙川市場]의 만세운동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헌병대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3월 4일 원장 장터에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서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 모락장으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행진하였다.
그들은 대형 태극기와 나팔수를 선두에 세우고 청년이 앞장서서 의기충천하여 거의 모락장에 도착하였다. 이때 한 청년이 반석면장 김종화(金宗化)가 밀고하여 일본헌병들이 장터 입구에 매복하여 시위군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였으나 이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계속하여 모락장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일본헌병들이 발포하여 곳곳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나, 시위군중 중 청장년들은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형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분견소장 사토[佐藤] 상등병은 재빨리 총을 쏘아대며 도망가다가 시위군중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먼저 달아났던 보조원 3명도 붙잡아 살해하고 구금 중이던 동지 전원을 무사히 구출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