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태로(台老). 황위(黃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입중(黃立中)이고, 아버지는 황형(黃泂)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한응문(韓應文)의 딸이다. 황회(黃淮)에게 입양되었다.
선교(宣敎)로 1646년(인조 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를 거쳐 정언, 사헌부지평 등의 언관직을 거치면서 권신들을 탄핵하여 명성을 얻었다. 1653년(효종 4)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가 다시 올라와 언관직인 지평·정언·장령·낭청·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 언관으로 있을 당시 예조의 당상관을 탄핵하고 난 뒤에 예조판서를 찾아가 만난 것이 언관의 직분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어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행해진 과시(科試)와 동당시(東堂試)의 폐해를 지적하는 등 직간을 서슴치 않았다. 1670년(현종 11) 가자(加資)되어 의주부윤으로 임명되어 외지로 나갔다가 1672년 황해감사로 임명되었다.
이 해 의주부윤에 있을 당시 군량(軍糧)과 은화(銀貨)를 탐하는 등 청렴하지 못하고 관풍을 깨끗이 하지 못했다는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1675년(숙종 1)에 우부승지를 거쳐 승지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