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도광(道光). 황연(黃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응징(黃應澄)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황여일(黃汝一)이다. 어머니는 김수일(金守一)의 딸이며, 부인은 박성(朴惺)의 딸이다.
생원으로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 · 헌납 · 낭청 · 사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1616년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추고당하였고, 1618년 다시 사서에 기용되었다. 이 해 명나라에서 요동순무를 위해 병마 7,000을 요청해 왔고, 조정에서 징병에 관한 의논이 있을 때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어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입직하다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으며, 이듬해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무과시험시 관원들이 뇌물을 받은 것을 고발하였다.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승지에 올라 왕의 측근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였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변방에 위리안치되었다. 이어 이듬해 내지로 양이(量移)되었고, 1633년 유배에서 풀려나 시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