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초명은 택중(宅中). 자는 자화(子和), 호는 화곡(華谷).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상구(黃尙耉)이다. 최창대(崔昌大)·이하곤(李夏坤)·구택규(具宅奎) 등의 문인이다.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금위영(禁衛營)의 서리(書吏)로 일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728년(영조 4)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반란군을 토벌하는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막하에서 서기로 일하였다.
이 때 무고하게 죄에 걸려든 많은 사람을 구해주었다. 그 뒤 영남의 남은 적을 토벌할 때에도 종사관 박문수(朴文秀)를 따라가서 많은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에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735년 조풍원(趙豐原)이 평안도관찰사로 갈 때 데리고 갔다.
다음해 첨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으며, 이 해 경기도관찰사 이종성(李宗城)의 천거로 영중(營中)의 재부(財賦)와 군정(軍政)의 일을 맡았다. 이 때 그와 주고받으면서 읊은 시가 많다. 1737년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러 가던 중 병으로 죽었다. 한성부좌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화곡집(華谷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