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전투.
역사적 배경
이들은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崔敬善)이 이끄는 300여 명의 농민군, 말목장터에 집결해 있던 수백 명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경과와 결과
농민군이 백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인근 금주·부안·고창 등 여러 읍의 동학농민군이 속속 집결하였다. 그래서 농민군 진영에서는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손화중·김개남을 총관령으로, 또 최경선을 영솔장에 임명하는 등 진영을 확대·개편하였다.
또한, 창의의 뜻을 밝히는 「사대명의(四大名義)」를 발표하고, 민중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檄文)을 전국에 띄웠다. 그 뒤 4월 1일태인, 4월 4일 부안관아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한편, 당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무장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들이 고부를 점령하고 백산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이를 의정부에 보고하는 한편, 이서와 군교를 풀어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1893년에 설치된 무남영(武南營)의 영관 이경호(李景鎬)로 하여금 무남영의 군대와 잡색, 각 읍에서 올라온 포군(砲軍)을 거느리고 금구 대로로 나가 동학농민군의 진격을 막도록 조처하였다.
그런데 4월 4일 부안관아를 점령하여 무기고를 열고 무장을 강화한 농민군 1만여 명은 전라감영군이 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온다는 정보를 듣자, 전주를 향해가던 진로를 바꾸어 부안과 고부의 접경지대에 근접한 성황산(城隍山)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무남영병 700여 명과 보부상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향병 600여 명은 원평·태인을 거쳐 백산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드디어 4월 6일 농민군과 감영군은 태인의 용산 화호(禾湖)나루 부근에서 최초로 접전하였다.
이때 농민군 측은 거짓 패한 체하며 후퇴하였다. 다시 농민군 측이 고부의 매교(梅橋)로 퇴각하자, 백산의 감영군이 추격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또다시 거짓 패한 체하며 황토재로 올라갔다. 감영군 역시 계속 추격하여 황토재 인근에 진을 쳤다.
이렇게 두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동안 날이 어두워져 4월 6일은 저물어갔다. 4월 7일 새벽이 되자 황토재 마루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농민군은 고개 아래에 주둔하고 있는 감영군 진영을 향하여 포를 쏘아대며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감영군은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일거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농민군은 혼란에 빠진 감영군을 뒤쫓아 영관 이경호 등을 죽이는 등 감영군을 격퇴함으로써 관군과의 최초의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동학란기록(東學亂記錄)』
- 『오하기문(梧下記聞)』
- 『동비토록(東匪討錄)』
- 『동학사(東學史)』(오지영, 영창서관, 1940)
- 『전봉준실기(全琫準實記)』(장봉선, 이로재, 1936)
-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 ① 봉기-전주성점령-」(이이화, 『역사비평』 7, 1989)
-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의 제1차농민전쟁(第一次農民戰爭)」(신용하, 『한국학보(韓國學報)』 40,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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