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3월 28일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 마닐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에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항일운동단체인 의열단에서는 다나카를 사살할 것을 결정하고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오성륜(吳成崙, 또는 이정룡)은 다나카가 기선에서 내릴 때, 김익상(金益相)은 오성륜이 실패할 경우 다나카가 승용차로 향할 때 저격하기로 하였으며, 이 역시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이종암(李鍾巖)은 다나카가 승용차에 오를 때 저격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 다나카가 도착하여 하선하면서 마중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 오성륜이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온 영국인 신부가 다나카 앞을 지나다가 총탄에 맞아 즉사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놀란 다나카가 황급히 자동차로 달려갈 때 제2선을 담당하였던 김익상이 재빨리 발사하였으나 총탄은 다나카의 모자만을 관통하였다.
이에 제3선을 담당하였던 이종암이 몰려든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면서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마저 불발됨으로써 다나카저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저격에 실패한 이들은 곧바로 도주하였으나, 김익상과 오성륜은 사천로(四川路)에서 경찰에 붙잡혀 일본총영사관으로 인도되었다가 나가사키(長崎)로 이송되었다.
그 뒤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하여 중국으로 피신하였지만, 김익상은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 나가사키공소원(長崎控訴院)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1924년 무기로 감형으로 감형되었고 누차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다나카저격사건으로 불행하게 신부를 잃은 영국인 톰슨은 저격자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인물임을 알고 일본 사법당국에 김익상을 관대하게 처리하도록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탈옥하여 중국에 온 오성륜은 그 뒤 계속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