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접주이다. 일명 황해일(黃海一). 보은출신. 남접계(南接系) 동학지도자로서 1883년(고종 20) 3월 서인주(徐仁周: 璋玉 또는 一海라고도 함)와 함께 당시 동학교문의 지도자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입도하였다.
1885년 관의 탄압을 피하여 피신생활 중인 최시형의 은신처를 주선하는 등 북접(北接)과도 긴밀한 협력을 하였다. 1880년대 후반에는 전봉준(全琫準)을 서인주에게 소개하여 동학에 입도시켰으며, 1894년 3월 전봉준 등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起包)할 때까지 서인주 등과 함께 남접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893년 3월 동학교도가 중심이 되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보은취회(報恩聚會)가 이루어졌을 때, 최시형 등과 함께 보은취회를 주도하였으며, 남접과의 적극적 연대에 주력하였다.
이로 인하여 보은취회와 함께 당시 전라도 금구 원평에서 이루어졌던 남접 중심의 ‘금구취회(金溝聚會)’의 괴수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1894년 9월 남접·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연합하여 기포할 당시, 김연국(金演局)·권병덕(權秉悳) 등과 함께 보은에서 기포하여 논산으로 집결하였다. 이후 남접·북접 연합의 농민군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