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현성지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고려 전기에 축조된 포곡식성의 성곽터이다. 1988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의 둘레는 약 620m이고, 잔존하는 체성부는 약 150m이다. 처음 축조한 이후 적어도 2차례 이상의 수·개축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 이후 오랫동안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인 치소성으로 사용되었다. 1281년(충렬왕 7)에 여몽연합군이 2차로 일본을 정벌할 때 이 성에 충렬왕이 3개월 동안 머물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정동행성과 절도사영이 위치하는 등 행정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회원현성지는 무학산 남쪽 기슭에 돌출한 해발 143m의 낮은 야산의 서남쪽 계곡을 둘러싸고 있으며, 11세기 이전 고려시대 초기에 축성된 포곡식성이다. ‘자산산성(慈山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남북을 장축으로 한 장타원형을 하고 있다. 과거 성내인 시립박물관 일대를 지나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동벽 체성부는 박물관 앞쪽을 관통하는 도로의 개설로 인해 일부 구간이 단절되었지만, 도로구간을 제외하면 그 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의 사면을 지나서 몽고정 뒤쪽까지 체성부가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의 둘레는 정상부를 기준으로 약 620m이고, 시립박물관 앞 관통도로 아래 잔존하는 체성부는 약 150m이다. 폭은 4.3m∼5.2m이고, 잔존하는 최고의 높이는 4.5m 정도이다. 1988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회원현성지는 삼국시대에는 골포현(骨浦縣), 고려시대에는 합포현(合浦縣) · 회원현(會原縣)의 치소(治所)로 사용되었다. 특히 고려시대 때에는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에 의해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설치되었으며, 일본을 공격하기 위하여 여몽연합군의 출발지와 주둔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합포성(合浦城)으로 이전하기 전의 절도사영(節度使營)으로서도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회원현성지는 1988년과 2004년에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2005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아직까지 경남지방에서는 조사의 사례가 부족한 판축토성이 확인되었고, 아울러 시기별로 다르게 확인되는 기단석축 양상, 내 · 외벽에서 확인되는 영정주흔, 내벽의 석축으로 쌓은 축조구분점, 내황, 수혈건물지 등과 각종 다양한 문양과 명문이 확인되는 기와편 등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회원현성 체성(體城)의 축조과정은 초축 이후 적어도 2차례 이상의 수 ·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축조시기에 따라 축조수법이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판축의 두께는 5~15㎝ 내외로 일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경남지역 토성의 판축 두께와 동일하며, 기단석축은 석축령이 총 3차례 확인되었다. 또한 판축구간은 약 4m 내외인데, 이것은 초축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1 · 2차의 수 · 개축에서도 같은 양상이며, 하나의 판축구간은 4m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회원현성의 내벽 겉쌓기한 석축에서는 초축과 중축의 축조구분점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것은 4m 간격으로 조성된 목주의 길이가 대략 1~1.5m를 넘지 못하고 2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 초축과 중축시에 목주를 받치거나 둘러싼 석재의 양상과 4m 구간마다 체성부와 직교하게 축조되어 있는 내벽 축조구분 석렬에서도 상하의 축조시기 차이가 확인되고 있다.
회원현성 내부에서는 건물지의 일부로 추정되는 석축시설이 동벽 체성부 내벽에서 확인되었으며, 여기에서 명문기와 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또 북쪽 정상부에는 남향으로 폭 25∼30㎝, 길이 2.2m의 배수시설을 구비한 약 3.3m의 석축시설이 남아 있다. 이 건물지는 장대나 금당, 사당과 같은 건물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내벽 조사구간에서는 단면 ‘U’자 상의 구상유구가 일부 확인되고 있으므로 부분적인 내황이 확인되었고, 북벽과 북문지 주변에서 외황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어 내황과 외황을 모두 갖춘 성곽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출토 유물은 대부분이 기와이며, 평기와는 어골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회원현성의 축조시기는 전체적인 유물의 출토 양상을 고려하면 적어도 고려시대 초에는 이미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명문기와 가운데 ‘정풍이년정축(正豊二年丁丑)’명 기와는 1157년(의종 11)에 해당한다. 또한 의춘현(宜春縣)은 의령의 별칭으로 1018년(현종 9)에 지금의 진주인 강양군(江陽郡)의 속현으로 삼았다는 기사를 참고한다면 적어도 11세기 이전에는 회원현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명문기와들이 1차 수축 성벽과 2차 수축 성벽에서 확인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초축의 판축토성 연대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좀 더 올라갈 수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1세기 현종대를 전후한 시기에 수 · 개축이 한 차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4세기 어느 시점에 또 다시 수축 내지 기와의 수즙(修葺)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내벽의 일부에서만 확인되는 양상이라 전면적인 수 · 개축으로 단언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회원현성은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는 이미 폐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충렬왕 7)에 여몽연합군이 2차로 일본을 정벌할 때 충렬왕이 환송을 위하여 3개월 동안 합포에 머물렀다. 이것을 참조한다면 적어도 회원현성지에는 왕실의 별궁(別宮)과 같은 시설이 상존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회원현성지는 삼국시대 이후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치소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치소성(治所城)으로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정동행성과 절도사영이 위치하는 등 행정적 ·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