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전투는 1951년 2월 11일부터 횡성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이다. 이 전투의 배경은 유엔군이 남한산 교두교를 제외하고 한강 남안을 확보하며 중공군을 위기에 몰아넣은 것에 있었다. 중공군은 위기를 돌파하고자 가장 먼저 기동력과 화력이 약한 국군이 배치된 횡성 지역을 공격하였다. 국군은 중공군의 공격 3시간 후 후방이 차단되며 고립되었고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거나 개별적으로 철수하였다. 국군을 지원하던 미군 지원부대도 화포와 차량 등을 버리고 철수하였다. 횡성전투 결과, 국군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인원은 장교 323명과 사병 7,142명으로 추산된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 공세)로 평택∼원주∼단양∼정선∼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한 유엔군은 1951년 1월 15일부터 평택에서 수원까지 적의 배치와 규모를 탐색할 목적으로 서부전선에서 울프하운드 작전(Operation Wolfhound)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유엔군은 수원∼여주 이남지역에는 중공군의 소규모 부대만이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토대로 유엔군은 수색정찰에서 지역확보로 작전개념을 전환하고 1월 25일을 기해 일제히 반격작전을 감행하였다. 썬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으로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2월 초까지 공산군의 남한산 교두보를 제외하고 한강 남안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서부전선에서 썬더볼트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라운드업 작전(Operation Round Up)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은 서부전선의 썬더볼트 작전과 보조를 맞추어 한강 남안에서 홍천으로 연결되는 선을 확보하여 서울 탈환의 여건을 조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작전과정에서 국군이 선봉을, 미군이 후속부대의 임무를 담당하도록 한 것은 서부전선의 작전과는 정반대되는 병력운용 방법이었다.
라운드업 작전은 국군 제5사단과 제8사단이 공격부대가 되어 2월 5일에 개시되었으며, 작전개시 후 약 3일 동안에는 예정대로 계획된 제한목표들과 통제선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그 후 공산군의 주저항선에 부딪치면서 더 이상의 전진이 어려웠다.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3사단까지 추가로 투입하고서도 2월 11일에 제1단계 목표인 오음산∼포동리선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은 새로운 공세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조중연합사령관 펑더화이는 서부전선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중동부전선에 대한 집중 공격을 계획하였다. 즉 서부전선에서는 한강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전진을 저지시키고, 대신에 주력을 가평∼홍천 일대에 집결시켜 양평∼횡성(삼마치고개) 일대의 유엔군 전선 돌출부에 대해 공세를 가한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첫 번째 공격목표는 기동력과 화력이 열세한 국군 제8사단이 배치된 횡성지역이었다.
중공군은 1951년 2월 11일 17시를 기해 횡성공격을 시작하였다. 우선 중공군 제42군단 제124사단이 횡성 서북방에서 진격로를 개척하고, 이어 19시에 중공군 제66군단 주력이 국군 제8사단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예비대 없이 예하의 3개 연대를 모두 전선에 투입해 진격하라는 미 제10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횡성 북방 삼마치고개로 진출한 국군 제8사단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사력을 다했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제8사단은 중공군의 공격 3시간 후인 2월 12일 01시경부터 지휘통신의 두절과 함께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제8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되자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거나 혹은 개별적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국군 제8사단의 조기붕괴는 사단을 지원하던 미군 지원부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미군 지원부대들은 전방사단의 붕괴사실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함으로써 이들마저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이로 인해 미군 지원부대들은 화포와 차량 등 많은 중장비를 버리고 산악능선을 따라 횡성으로 철수하였다.
철수과정에서 미 제7사단 제38연대에 배속된 네덜란드대대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네덜란드대대는 전방부대가 횡성으로 철수하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횡성교를 대대장의 전사와 적중 고립의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12일 야간까지 확보해 줌으로써 분산되었던 부대들의 철수가 그나마 가능하였다.
횡성전투 결과, 국군 제8사단은 잔여병력이 장교 263명과 사병 3,000명에 불과했고 이 중 절반 이상이 사단 근무요원이었다. 전사하거나 실종된 인원은 장교 323명과 사병 7,142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여기에는 제10연대의 연대장과 전 참모, 제16연대의 부연대장, 7명의 대대장과 30명의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사단이 보유한 대부분의 장비가 손실되었다.
횡성전투 이후 국군 제8사단은 원주 남쪽의 주천리로 물러나 일단 부대를 수습한 다음 다시 대구로 이동하여 재편성을 실시한 후 후방의 공비토벌작전에 임하게 되었으며, 중공군은 횡성 남쪽의 원주와 지평리로 진출하여 2월 공세를 계속하였으나 지평리에서 이들의 공세는 저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