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는 경회루(慶會樓) 동남쪽이었다. 1438년(세종 20) 1월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완성해 놓은 흠경각과 옥루는 적어도 6년 이상 걸려 계획되고 만들어진 것으로, 그 경위와 이 장치의 교묘한 작용에 대한 설명은 김돈(金墩)의 『흠경각기(欽敬閣記)』에 남아 있다.
흠경각이라는 이름은 세종이 지은 것으로,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에 나오는 전설에서 요임금이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때를 일러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문구에서 유래한다.
흠경각 안에 장치된 천문시계는 물의 흐름으로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돌아가면서 시간과 천상(天象)이 표시되도록 만든 교묘한 것이었다. 7자 되는 인조산을 종이로 발라 만들고 그 둘레에 금으로 만든 해가 돌게 하였으며, 옥녀(玉女) 넷과 방위신 넷이 시각에 정확히 맞게 움직이고, 다른 인형이 때에 맞추어 종이나 북 또는 징을 치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교묘한 시설의 등장은 원나라를 통해서 받아들인 아라비아 천문기구의 영향을 일부 받은 데다 세종과 그 신하들의 창조적인 노력 때문에 가능하였다.
15세기까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 물시계를 설치했던 흠경각은 원래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세워졌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으나, 반세기 뒤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에는 강녕전(康寧殿)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기는 어려우나 경회루의 동쪽 또는 동남쪽인 것은 확실하다.
이 시설은 너무 정교해서 성종대에는 이미 사용되지 못하여 수리한 일도 있고, 1553년(명종 8)에는 이 일대가 화재로 타 버려 다음해 사인(舍人) 박민헌(朴民獻) 등을 시켜 복구한 일도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모두 불탄 이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같은 이름의 전각은 1614년(광해군 6) 창덕궁에 세워졌고, 그 뒤 1770년(영조 46)에는 관상감(觀象監)에 다시 세워졌다. 그 후 흠경각에 무슨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