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기인은 월시(J.A. Walsh,1867∼1936) 신부와 프라이스(T.F. Price)신부였다. 창설 당시의 명칭은 ‘미국 외방전교회’(Catholic Foreign Misson Society of America)였으며, 메리놀 형제회로도 알려져 있다. 정식 명칭은 '메리놀외방전교회'이나 '메리놀회'로 약칭하기도 한다.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의 지시를 받으며 본부는 미국 뉴욕주 오시닝 (Ossining)에 있다.
미국 가톨릭 교회가 아시아 지역의 전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이다.
중국에 진출해 활동하던 메리놀회는 새로운 선교지역으로 한국 진출을 모색하였다. 1916년 외방전교회의 총장 월시 신부가 내한하여 뮈텔 주교를 만나자, 파리 외방전교회는 평안도 지방의 관할권을 내주었다. 이후 메리놀회의 역사는 3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23년 5월부터 1930년 4월까지로,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시기이다. 192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는데, 점차 은산(殷山), 마산(馬山), 비현(批峴), 중화(中和) 등에도 본당을 신설하였다. 1927년 3월 평양지목구(平讓知牧區)를 설정되고, 19개의 본당에 총 신자수는 17,738명으로 증가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1930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이다. 모리스(J. E. Morris, 睦治世, 1889∼1987)몬시뇰이 지목구장으로 활동한 시기로, 평양을 중심으로 문서선교, 평신도 쇄신운동 등 다양한 선교정책을 실행에 옮긴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빚던 몬시뇰이 평양교구장을 사임한 이후부터 1942년 6월 메리놀회 선교사 전원이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기까지이다. 당시 총 51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21개의 본당을 설립하였으며, 총 신자가 26,424명에 달한 상태였다.
해방 후 남북 분단으로 선교지를 잃은 메리놀회는 남쪽에서 선교 사업을 계속했다. 한국 전쟁기에는 가톨릭 구제회(NCWC)를 통해 구호사업을 펴는 한편, 나환자를 위해 서울 오류동에 성 라자로 마을을 설립하였다. 1950년대부터 충청북도 청주를 중심으로 포교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인천교구를 담당하였다. 현재 병원 사목, 구라회, 아동교육, 사회사업, 마리아 사제 운동 등 메리놀회선교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