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북한당국은 일본인 기술자들이 떠나고, 노동자·사무원들을 내세워 산업 부흥과 생산능률 제고운동을 본격 추진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계획은 기술자의 절대 부족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북한당국은 산업시설의 가동을 위해 기존 기술자의 동원 및 새로운 기술자 양산을 위한 별도의 조직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일본인 기술자들이 본국으로 떠나버린 데다, 내국인 기술자들조차도 유산계급 출신이거나 일제에 복무하였다는 이유로 이들을 친일파·민족반역자로 취급하면서 국영공장과 기업소에서 내쫓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산업시설의 가동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술자 부족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한당국으로서는 기술자조직이 필요하였고, 결국 북조선기술자협회를 만들게 되었다.
1946년 8월 17일 임시인민위원회는 「기술자확보에 관한 결정서」를 채택하기에 이르렀고, 10월 16∼17일에는 ‘제1차 북조선과학기술인대회’를 열고, 건국사업 수행에서 기술자와 과학자들의 적극 참여를 유도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 기술자가 떠난 상황에서, 북한지역의 산업시설의 가동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술자들을 최대한 동원하고, 새로운 기술자들을 양산하는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대 위원장은 이평제, 부위원장은 김우경이었다. 1948년 2월 1일 현재 회원의 수는 42,130명으로 집계되었다.
북한은 해방 직후 산업 부흥과 생산능률 제고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북조선기술자협회를 조직했지만, 숙련기술자들의 부족 현상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