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 직후인 1946년 4월부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중앙에서 계획한 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생산돌격대를 북한 전역에서 조직하였다. 생산돌격대는 1946년 4월 6일 북조선농민연맹 제2차 상무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조직되었다. 당시 상무위원회는 생산돌격대의 조직 목적을 “영농의 선봉적 역할과 축력 농기구 등의 공동이용을 수행하여 춘경파종 100퍼센트 완수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생산돌격대의 조직은 부락단위로 이루어 졌으며 그 구성원은 농민위원회와 민청의 성년·청년·부녀 중에서 ‘우수한 분자’로 이루어졌다. 생산돌격대는 생산선두에서 농민의 모범이 됨으로서 농촌의 핵심적인 청장년들을 동원하여 생산계획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추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생산돌격대는 농업경리, 특히 농번기 때 ‘밧가리돌격대’, ‘모내기돌격대’, ‘제초기돌격대’, ‘추수돌격대’ 등 각 작업마다 조직되었다.
생산돌격대의 명칭은 1947년 이후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여, 1948년 이후로는 생산돌격대 방식이 다수확 경쟁운동의 방식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1948년 2월 9일 제12차 회의에서 생산돌격대 등의 생산독려방식을 1948년부터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생산돌격대에서 다수확 경쟁운동으로의 전환은 빈농 중심에서 중농상층의 현실을 인정하는 농업증산정책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또한 행정적 조직화 보다는 과거의 공동노동 관행을 존중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