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무는 1908년에 소련에서 고려인 2세로 태어나 해방 전에는 소련에 거주하였다. 소련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방 직후 북한으로 들어와 조선공산당 원산시당 제2비서, 원산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였으며, 6·25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 해군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일무는 소련의 ‘특무 정치공작대’ 군사정치책임자인 김일성을 필두로 한 항일유격대집단이 군함을 타고 1945년 9월 19일 원산에 상륙할 때 원산시 공산당 조직부장 겸 원산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당시 원산시 군경무사령관인 꾸추모프(Кучумов В. И.) 대좌와 원산시 인민위 부위원장 태성수(太成洙), 원산시 상공부장 박병석, 소련군 태평양함대 사령부 산하 해병대 직속 정찰부대원이었던 정상진 등과 함께 일행을 맞이하였다.
1946년 8월 28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된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는 함경남도 대표로 참가하였다. 당시 창립대회에는 818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는데, 대회주석단에는 김일성을 비롯하여 31명이 선출되었다. 함경남도 대표인 한일무는 대회주석단에 포함되지 못했으나, 43명의 당중앙위원회 명단에는 포함되었다. 당시 소련계로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피선된 사람들로는 한일무를 위시하여 허가이(許哥而), 박창식, 김열, 김제욱, 태성수(太成洙), 전성화, 김영태 등 8명이었다.
대회는 ① 북조선노동당 창립에 대한 보고(김일성·김두봉), ② 당강령에 대한 보고(최창익), ③ 당규약에 대한 보고(김용범), ④ 중앙기관지에 대한 보고(태성수), ⑤ 당중앙위원회 선거, ⑥ 당중앙검열위원회 선거로 진행되었다. 함경남도 대표인 한일무는 김일성의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보고에 이어진 토론에서 함남의 당원 총수가 9만 7천여 명에 이르는 것은 함경남도 대중이 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지난 21일 도당대회를 중계방송했는데 많은 시민들이 너무 감격해서 대회장에 찾아왔다”고 지적하여 노동당이 일반대중의 지지를 획득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1948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 북로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는 강원도당 위원장으로서 중앙위원으로 유임되었다. 당시 한일무는 원산 지역을 ‘종파의 소굴’이라고 단정, 종파주의가 기댈 곳이 이주하(李舟河)에서 최용달(崔容達)로 교체되었다고 비난하고, 오기섭(吳琪燮), 정달헌(鄭達憲), 최용달, 이강국(李康國)의 과오를 지적, 자기비판을 요구하였다. 같은 해 8월 25일에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시에는 차관급인 민족보위부상으로 기용되었으며,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6월 10일에 중장 계급으로 조선인민군 해군사령관에 임명되어 전쟁에 가담하였다. 1956년 4월의 제3차 당대회에서는 다시금 당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이후 북한 내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한일무는 소련으로 갔고,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당국은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을 맞아 1958년 1월 21일에 한일무에게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