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광주광역시) (())

광주광역시 서구청
광주광역시 서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광주광역시 중서부에 위치한 구(區).
정의
광주광역시 중서부에 위치한 구(區).
개관

서구는 광주광역시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남구, 북쪽으로는 북구, 서쪽으로는 광산구, 남쪽으로는 남구에 접해 있다. 동경 126°54'∼126°48', 북위 35°05'∼35°10'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47.79㎢, 인구는 30만 5028명이다.(2015년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18개 행정동(18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에 위치해 있다.

자연환경

서구는 전형적인 침식지형으로, 광주천과 영산강(극락강) 유역은 충적층을 가진 지형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구 동쪽 남구와의 경계선을 따라 저산성의 산지가 발달하여 있고, 서쪽과 남쪽으로 이어지면서 평평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금당산, 송산, 화방산, 송학산으로 저산성 산지가 이어지면서 남서쪽 방향으로 남구와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광주천과 영산강은 치평동에서 합류하는데, 이들 하천이 주변에 충적지를 형성하여 낮은 평야를 형성하여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황해 연안을 흐르는 제주해류(황해해류)와 남서쪽에서 이동해 오는 저기압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난하고 강수량이 많다. 또한 전남평야와 노령산지의 경계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양 지역의 점이형(漸移型)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3.6℃이며, 1월 평균기온 -0.0℃, 8월 평균기온 26.1℃로 연교차(年較差)는 26.2℃이다. 강수량은 연중총량 1289㎜로, 3∼5월에 18%, 6∼9월에 59%의 비가 내리며, 연강수일수는 133일 정도이다.

바람은 북서풍과 서풍이 많고, 여름철에는 남동쪽을 가로막고 있는 무등산지의 영향으로 남풍과 서풍이 많다. 계절풍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북서계절풍, 여름에는 남서계절풍이 분다.

역사

효덕동·유덕동·서창동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편과 석기류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청동기 이전부터 극락강 부근 구릉지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광주광역시는 백제시대에 노지(奴只)라 하였다가 나중에 무진군이라고 고쳤고, 757년(신라 경덕왕 16)부터 무주라 부르게 되었다. 892년에는 견훤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우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무주를 광주로 고쳤으며, 이후 해양현-익주-광주목-화평부-무진주-광주목 등으로 지명이 자주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1430년(세종 12)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1451년 다시 광주목으로, 1489년 광산현으로, 이후 광주목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며, 강등과 승격이 자주 발생하였다. 1896년(고종 33) 광주군에 전라남도관찰부를 두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광주군은 15면 152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서구 지역은 극락면과 서창면에 속하게 되었다. 1930년 서구 지역인 극락면 송정이 화정리로 개칭되었고, 1935년 신기리와 내방리가 광주읍에 편입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광주부가 광주시로 개칭되었고, 1955년 광산군의 서방면, 효지면, 극락면, 석곡면 일부가 광주시에 편입되었다. 1955년 광주시에 4개 출장소가 개설되었는데, 서구 지역은 유림출장소 관할 하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7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중부·동부·북부출장소가 통합되어 동구가 되었고, 남부·서부·지산출장소가 통합되어 서구가 되었다. 서구는 46개 동을 관할하였다.

1979년 서구는 월산2동을 월산2·4동, 상무동을 쌍촌·화내동으로 나누었고, 1980년 북구가 신설되자 서구 관할의 지산출장소, 유·누문·북·임·동운·소태동을 통합하여 북구로 편입시키고, 동구 관할의 양림·방림1동을 서구로 편입하였다.

1983년 서구 관할의 화내동이 화정1동·2동으로, 농성동이 농성1·2동으로 분동 되었으며, 1985년 월산5동·주월2동·백운2동이 분동 되었다. 1990년에는 화정2동이 분동 되어, 화정3동이 신설되었고, 방림2동에서 봉선동을 분동 되었다.

1995년 남구가 분리되면서, 서구 관할의 14개동이 남구에 이관되었다. 이와 함께 광산구 서창동을 서구로 편입하였으며, 1999년 양1동과 2동을 양동으로 통합하였다. 2001년 서창동이 서창동과 금호풍암동으로 분동 되었고, 2002년 상무1동이 치평동으로 개칭되었다.2003년에는 금호풍암동이 금호동과 풍암동으로, 2005년 금호동이 금호1·2동으로 분동 되어, 서구는 현재와 같이 17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유물·유적

서구의 문화재로는 국가지정 유형문화재인 안중근 의사 유묵(보물, 1972년 지정), 광주광역시 지정 문화재인 운천사 마애여래좌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병천사(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회재유집 목판(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996년 지정), 완제 시조창(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1995년 지정), 판소리 강산제(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1998년 지정), 판소리 동편제(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1998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광주광역시 기념물로는 화담사(광주광역시 기념물, 1993년 지정)가 있으며, 문화재자료인 만귀정(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지석묘(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유촌동 석조여래좌상(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1996년 지정) 등이 있다.

교육·문화

서구의 교육기관은 2015년 현재 초등학교 30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8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공공도서관으로는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 서구문화센터도서관이 있고, 의료시설로는 종합병원 2개, 병원 9개, 의원 176개, 치과병(의)원 94개, 한방병원 1개, 한의원 57개, 부속의원 1개, 보건소 1개, 보건진료소 1개가 있다.

사회복지시설로는 노인여가복지시설인 노인복지회관 1곳, 노인주거·의료복지시설인 동일동산, 세실리아요양원, 베데스다요양원, 벧엘요양원, 동명전문요양원, 벧엘타운실버양로원, 베데스다실버홈 7개, 장애인복지시설 2개, 여성복지시설 1개, 경로당 178개, 노인교실 2개가 있다.

청소년수련시설은 수련관 2개, 문화의집 2개, 수련원 1개가 있으며, 체육시설은 월드컵경기장과 염주체육관을 포함하여 종합운동장 1개, 실내체육관 4개, 빙상장 1개, 테니스장 1개, 수영장 3개, 신고체육시설로 수영장 3개, 테니스장 4개, 골프연습장 15개, 볼링장 3개, 체육도장 55개가 있다.

서구의 문화공간은 공공 공연장 5개, 영화상영관 10개가 있고, 전시실로 화랑 3개, 지역문화복지시설로 복지회관 9개, 청소년회관 1개가 있으며, 기타시설로 문화원 1개, 전수회관 1개가 있다.

서구문화센터는 공연, 영화, 연극, 대관을 위한 464석의 공연장, 제1·2전시실을 갖춘 갤러리, 각종 운동시설, 공공도서관이 복합적으로 갖추어져 있어, 구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충족과 청소년들의 다양한 활동공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빛고을 국악전수관은 156석의 공연장, 제1·2전수실, 기획전시실, 뮤지엄샵, 상설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국악의 계승·발전과 함께,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국악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전시, 전수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을 제공되고 있다.

설화·민요

과거 서구의 운천동 방죽 일대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그 숲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현재에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백석사라는 조그마한 절과 석불에 얽힌 설화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0년대 방죽 근처 마을에 사는 용수라는 소년이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소년은 집 뒤 뽕밭에 있던 석불에 매일 깨끗한 돌덩이 하나씩을 바치면서, 반년 전에 죽은 네 살짜리 동생 용덕이를 돌아가신 어머니 곁으로 데려가 달라고 빌었다. 어느날 일본인 부호가 이 석불을 가져갔는데, 꿈자리가 사나워 백석사라는 절에 갖다 주었다. 하지만 이 절의 주지도 흉한 일이 발생하여, 이 석불을 연못에 던져버렸다. 용수는 이 석불을 찾기 위해 연못을 맴돌았는데, 그러던 중 어머니가 용덕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용수는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지만 물속에 빠졌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 일대의 돌들이 하얗게 변했고, 사람들은 이 마을을 백석(白石)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산업·교통

서구 광천동에는 과거 공단이 조성된바 있지만, 점차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공단이 외곽으로 이전하고, 중심에는 주거지 및 상업지가 형성되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은 아직 남아 광주의 생산도시화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지만, 서구의 제조업 비중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구 지역은 상무 신도심 개발과 신세계 백화점 등 다양한 쇼핑몰들이 등장하면서 서비스업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서구의 사업체 수는 총 2만 527개로, 농업 및 임업 3개, 광업 4개, 제조업 871개, 전기·가스 및 수도사업 12개, 건설업 990개, 도매 및 소매업 6287개, 숙박 및 음식점업 3388개, 운수업 1838개, 통신업 146개, 금융 및 보험업 374개, 부동산 및 임대업 730개, 사업 서비스업 198개,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행정 58개, 교육서비스업 1365개,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553개, 오락·문화 및 운동관련 산업 769개, 기타 공공·수리 및 개인서비스업 2391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구는 지리적으로 광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 수요가 상당히 많은 지역이다. 순환도로와 제2순환도로가 통과하고, 영광과 담양을 연결하는 국도 22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또한 빛고을로를 통하여 호남고속국도와 연결되고, 광로를 통해 광산구와 연결된다. 한편 서광주역이 위치해 있고, 광주지하철 1호선이 구의 중심부를 통과해 동구의 구도심과 광산구를 연결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역이다.

관광

서구는 뛰어난 자연환경을 갖추거나 많은 인문자원이 입지하고 있지 않아, 광주광역시의 다른 구에 비해 관광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 하지만 서구에 위치하고 있는 금당산, 개금산, 백마산, 짚봉산, 백석산 등에는 각종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많은 주민과 등산객들에게 이용되고 있으며, 도시공원이 잘 개발되어 있다. 상무시민공원, 5·18기념공원, 5·18자유공원, 상무조각공원, 중앙공원, 풍암생활체육공원, 운천저수지, 풍암저수지, 전평제 등은 구민들이 자주 찾는 공원이다.

양동시장은 호남 최대의 재래시장으로, 서민들의 정취가 살아있는 장소이다. 서구의 명소로는 만귀정, 병천사, 서창 향토문화마을, 봉산사, 운천사 등이 있고, 매년 7월 말 서창 향토문화마을에서는 서창 만드리풍년제가 열리고 있다.

서구의 특산물로는 농업이 주 수입원인 서창동에서 생산되는 청수산 멜론, 방울토마토, 파프리카, 오이, 애호박, 미나리, 치정미 등이 있다.

동(洞)
  1. 양동(良洞)

조선 후기 공수방면(公水方面)에 속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공수방면의 덕림리, 도천면의 백운리, 군분면의 연례리 지역이 효천면 관할의 교사리가 되었다. 1923년 광주면 확장에 따라 효천면 교사리는 광주면 교사리가 되었고, 1935년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고 광주군이 광산군으로 바뀔 때, 광주부 천정(泉町)이 되었다.

해방 후인 1947년 정(町)을 가(街)와 동(洞)으로 바꿀 때 양동(良洞)으로 확정되었다. 1948년 양동이 1·2구로 분동 되었고, 1970년 양동1구에서 양동3구가 분동 되었다. 1973년 양동1·2·3구의 명칭이 양1·2·3동으로 변경되었고, 구제 실시에 따라 남부출장소 관할이던 양양1·2·3동은 서구의 관할이 되었다. 1999년 양1·2동이 통합되어 양동으로 개칭되었다.

1910년대 광주교 아래 백사장에는 2일, 7일장이 들어서 ‘광주큰장’이라 불렸다. 당시 오일장은 거래액이 연 7000만원이나 되어 전남 제일의 시장이 되었다. 이 시장은 1940년 양동 5번지에 새 터를 잡아 1800여 평, 634개 점포를 갖춰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2년에는 복개상가까지 마련되어 더욱 장세가 커졌고, 현재 광주·전남 최대의 상설시장이 되었다.

한일극장 주변 천변로에는 400여 개의 기계공구 상가들이 모여 있으며, 1997년에는 양동 60-37번지에 호남 최대의 금호생명빌딩이 준공되어, 현재 많은 업체가 입주해 있다.

  1. 농성동(農城洞)

조선 후기 광주군 군익면에 속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군익면의 연례리와 신흥리 지역이 신례리가 되어 광주군 극락면 관할이 되었다. 1935년 광주부 농성정(農城町)이 되었고, 1946년 근농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47년 농성동으로 변경되었다. 1973년 서구로 편제되었고, 1983년 농성동이 농성1·2동으로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구의 중심지로서 주거·업무 혼성 지역으로, 광주 서부 방면의 부도심 역할을 하고 있다. 각종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고, 일반상가와 단독주택 집단 주거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서부경찰서, 조달청, 광주전남중소기업청, 전남보건환경연구원, 광주상공회의소, 광천초등학교 등이 위치해 있다.

  1. 광천동(光川洞)

조선 후기 광주군 군분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군분면의 내동, 송정, 신방, 쌍촌리와 황계면 대자리의 각 일부가 내방리가 되어 광주군 극락면 관할이 되었다. 1935년 광주읍 확장으로, 극락면 내방리 일부가 광천정이 되었고, 1946년 광천정이 취락동 개칭되었으나, 이듬해 광천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구제 실시로 서구에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천동은 광주천과 극락천의 퇴적물이 쌓여 이루어진 자연제방 지형에 홍수방지를 위한 인공제방이 축조되면서, 본격적인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광주의 관문인 종합버스터미널과 대형유통업체인 신세계백화점, 효광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교통·상업·교육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서남권 교통, 상업, 교육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 유덕동(柳德洞)

조선 후기 광산군 송정면과 덕산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광주군 극락면 덕흥 유촌리가 되었다. 1935년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어 독립함으로써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어 광산군에 편제되었다.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유림출장소 관할 유림·덕흥동이 되었고, 1957년 광주시 유덕동, 1973년 서구 유덕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덕동은 극락강과 광주천이 만나는 곳으로, 홍수가 만들어 놓은 퇴적지인 자연제방 위에 마을이 들어섰다. 광주시로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농촌의 지역성을 갖고 있다. 1990년대까지도 이곳은 ‘미나리’의 주 생산지였다.

광주시의 오염 물질을 걸려내기 위한 하수종말처리장이 유덕동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상무4지구의 개발로 도시와 농촌 지역이 혼재된 지역이다. 광주시의 관문이 되는 서해안고속도로, 무안국제공항과 연결되는 광로 및 호남고속도로와 연결되는 도로가 개통되어 발전가능성이 큰 지역이다.

  1. 치평동(治平洞)

조선 후기 광주군 군분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쌍촌리가 되어 극락면 관할이 되었다.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쌍촌동이 되었고, 1961년 상무동으로 개칭되어 쌍촌, 치평, 내방, 화정동을 관할하다가, 1973년 서구에 편제되었다.

1979년 상무동이 쌍촌동과 화내동으로, 1993년 쌍촌동이 상무1·2동으로 분동 되어, 상무1동에 속했다가, 2003년 상무1동에서 치평동이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군 장교 교육기관인 상무대가 장성으로 이전한 자리에 개발된 지역으로, 광주의 행정·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는 지역이다. 광주광역시청, KBS 방송국, 한국은행 등 많은 관공서와 금융기관이 위치해 있다.

  1. 상무동(尙武洞)

조선 후기 광주군 군분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쌍촌리가 되어 극락면 관할이 되었다.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쌍촌동이 되었고, 1961년 상무동으로 개칭되어 쌍촌, 치평, 내방, 화정동을 관할하다가, 1973년 서구에 편제되었다. 1979년 상무동을 쌍촌동과 화내동으로, 1993년 쌍촌동을 상무1·2동으로 분동 하였고, 2003년 상무1동에서 치평동이 분리되었다.

대형 아파트와 원룸 단지 등이 신축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각종 음식점과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5·18기념문화관, 광주학생문화회관, 초·중·고·대학 등의 교육기관들이 두루 위치하여, 민주인권의식은 물론 학생들의 교육문예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무각사와 5·18기념공원 등의 충분한 녹지구역은 주민들의 여가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상무로, 월드컵 4강로, 화정로, 운천로 등 주요 간선도로의 접경지역으로, 상무신도심과 연계된 광주의 중심축으로 발전하고 있다.

광주지방국세청, 호남대학교, 서광주등기소 등이 자리잡고 있다.

  1. 화정동(花亭洞)

조선 후기 광주군 군익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군익면의 신흥, 중작, 송정, 신기리가 화정리가 되어, 광주군 극락면 관할이 되었다. 1955년 광산군 관약면 화정리가 광주시에 편입되어 화정동이 되었으나, 1961년 상무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79년 서구 상무동에서 쌍촌동, 화내동이 분동 되었고, 1983년 화내동이 화정1동과 화정2동으로 분동 되었다. 1990년 화정2동이 분동되어 화정3동이, 1994년 화정3동이 분동되어 화정4동이 설치되었다.

광주광역시 주요 간선도로인 상무로와 죽봉로에 인접하고 있으며, 금호전자랜드와 E마트 등이 위치하여 대형 상권이 입지해 있다. 단독주택과 아파트 지역이 혼재되어 있으며, 염주체육공원이 위치해 있고, 금호·풍암지구의 관문이 되는 지역이다. 주변에 염주체육관과 월드컵 경기장이 위치하고 있어, 체육·문화·복지기반이 잘 갖추어진 지역이다.

서부소방서, 광주광역시교육청, 출입국관리사무소, 국군광주병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1. 서창동(西倉洞)

조선시대 방하, 당부, 선도면이 1914년 서창면으로 통합되었고, 1935년 광주부 승격과 광산군 분리로 광산군에 편입되었다. 1957년 광주시로 편입되어 서호, 방하, 신호의 3개 동으로 분리되었다. 1963년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으로 환원되었다가, 1988년 광주직할시에 편입, 광산구 서창출장소로 개칭되었다. 1995년 서구로 편입되어 서창동이 되었다.

6개 법정동(서창, 용두, 세하, 벽진, 마륵, 매월)으로 구성된 도농 혼합지역으로, 도시근교 농업으로 청수산메론, 방울토마토 등 과채류 작물단지가 집중육성되고 있다. 서광주역 세권개발, 매월동 제2농수산물 도매시장, 자동차 매매상가 등 유통단지 개발이 실시되어 광주시민의 생활 편의를 지원하는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 지역이다.

  1. 금호동(金湖洞)

조선 후기 광주목 당부면에 속했고, 1914년 서창면 금호리가 신설되었다. 1957년 광주 지역 확장에 따라 광산군 서창면이 광주시에 편입, 광주시 서창출장소 관할 방하동에 속하였다. 1963년 광산군에 재편입되어 서창면 금호리가 되었다. 1988년 광산구 서창출장소 관할 풍암동이 되었고, 1995년 서구로 편입되어 서창동이 되었다. 2001년 서창동에서 금호풍암동으로 분동 되었고, 2003년 금호풍암동이 금호동과 풍암동으로 분동 되었다. 2005년 금호동이 금호1·2동으로 분동 되었다.

CBS 방송국, 서구문화센터, 서구문화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1. 풍암동(風岩洞)

조선 후기 광주목 당부면 지역으로, 1914년 서창면 풍암리가 신설되었고, 1957년 광주 지역 확장으로 광산군 서창면이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풍암동이 되었다가, 이후 방하동 관할이 되었다.

1963년 광산군에 재편입되어 서창면 풍암리가 되었다. 1988년 광산구 서창출장소 풍암동이 되었고, 1995년 서구로 편입되어 서창동이 되었다. 2001년 서창동에서 금호풍암동으로 분동 되었고, 2003년 금호풍암동에서 풍암동으로 분동 되었다.

풍암동은 풍암택지개발지구로 개발되어, 아파트와 단독주택지가 어우러진 신흥 주택단지로 제2순환도로가 연결되어 주거 환경이 좋은 지역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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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지』전라·제주편 (국토지리정보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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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재래시장』(광주민속박물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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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사』(광주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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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동연혁지』(한국향토문화진흥원, 1991)
『광주의 문화유적』(광주직할시, 1990)
『광주의 전설』(광주직할시, 1990)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광주광역시 서구(seogu.gwangju.kr)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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