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승려 일행(一行)이 세운 것으로, 2001년 4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문은 이충겸(李冲謙)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명필인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썼다. 비문에는 불교의 전래 및 사찰의 증건 · 중수 상황과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에 도읍을 옮겨올 때 임금의 거처로 사용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비문 말미의 “숭정기원후팔십칠년갑오육월일립 남원양응집각후서(崇禎紀元後八十七年甲午六月日立 南原梁應潗刻後書)”란 각수(刻手)의 기년으로 보아 1714년(숙종 40)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적석사는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 등의 기록에 의하면 백련사 및 청련사와 함께 416년(장수왕 4)에 창건되었고, 처음에는 적련사(赤蓮寺)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전설에는 천축국 승려가 고려산에 올라 다섯 색의 연꽃이 피어 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는데,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전체 높이는 394㎝이며, 비신의 높이는 304㎝, 너비는 69㎝이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지붕모양의 뚜껑돌이 얹혀 있으며, 비신의 상부에 “고려산적석사지비(高麗山積石寺之碑)”라는 비의 제목이 있다. 비문의 글씨는 윤순이 35세 때 쓴 해서(楷書)로 중국의 문장가 소식(蘇軾)의 필의가 배어 있는데, 특히 가로획의 수필(收筆) 부분이나 적(翟)획[갈고리] 부분에서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난다.
적석사를 오르는 길목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비문에는 적석사의 증건 · 중수 상황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명필인 백하 윤순의 30대 필적이 남아 있어, 역사적 · 서예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