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제사장이나 지배자들은 자신의 정치·사회·종교적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손에 들거나 짚었던 지팡이나 막대끝에 방울 모양의 장식을 끼워 사용하였다. 간두령은 가늘고 긴 장대의 머리에 방울이 달린 모양 때문에 ‘장대 투겁 방울’이라고도 부른다. 남한 지역의 초기 철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유물이다.
간두령은 대체로 서기전 2∼1세기에 지금의 충청남도·전라남도의 연안 지역과 대구·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북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제사장이나 정치 지배자들이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여러 장신구 가운데 몸통이 포탄 모양으로 생긴 것만을 일컬어왔다. 그러나 서기전 5∼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 제2송화강(松花江) 유역의 길림성 길림시(吉林市) 후석산(猴石山) 돌널무덤 고분군과 400년 경에 조성된 부산 복천동 22호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에서 출토된 것도 간두령에 속한다. 이 간두령 역시 고분을 조성한 집단 가운데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특징있는 간두령은 서기전 2∼1세기에 만들어진 충청남도·전라남도 연안 지역과 대구·경주 등 경상북도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간두령은 원반 모양으로 돌출되어 있는 테두리를 기준으로 그 위의 몸통 부분과 아래의 투겁 부분으로 나뉜다. 몸통 부분은 대체로 포탄 모양이다. 몸통 안에는 머리 꼭대기에서 5∼7㎝ 되는 지점에 1∼2개의 둥근 구멍을 뚫은 칸막이가 있는데, 칸막이 안에는 소리를 내기 위한 동환(銅丸)이 들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머리 꼭대기 바로 아래부터 칸막이가 있는 지점까지의 몸통에 사방 4개의 길죽한 절개부가 형성되어 있다. 절개부 사이의 몸통 겉면에는 네모꼴 연속 무늬, 짧은 선무늬 띠, 이등변삼각꼴 무늬 등의 여러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무늬는 원반 모양 테두리 아래의 투겁 겉면에도 새겨져 있기도 한다. 한편 투겁 한쪽 부분에 둥근 고리가 달려 있는 것도 있다.
몸통이 포탄 모양인 간두령은 전(傳) 논산(국보, 1973년 지정), 전 덕산(국보, 1990년 지정), 전 경주 죽동리(보물, 1993년 지정), 함평 초포리 돌무지널무덤, 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품, 전 상주, 경산 임당동 BI-7호 널무덤, 경주 입실리, 대구 신천동 등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특히 함평 초포리 돌무지널무덤과 경산 임당동 BI-7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간두령과 화순 대곡리에서 확인된 다른 방울을 통해서 간두령의 시간적 선후 관계와 제작 기법의 확산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곧 간두령은 서기전 2세기에 충청남도·전라남도 해안 지역에서 쌍두령(雙頭鈴)·팔주령(八珠鈴) 등과 함께 출현한 뒤, 서기전 2세기를 넘지 않는 시점에 경상북도 상주로 확산되었고, 서기전 1세기 전반에 이르러 대구·경주까지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간두령은 좁은놋단검〔細形銅劍〕·청동창〔銅鉾〕·청동꺽창〔銅戈〕등과는 달리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만 제작되었다. 경상도 전역에서 보면, 서한경(西漢鏡), 쇠뿔손잡이 달린 긴목항아리〔牛角形把手長頸壺〕, 주머니 단지과 함께 전형적인 널무덤이 조합한 창원 다호리 유적 1기에 대응되는 시점인 서기전 1세기 말에 남한에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간두령 모양을 보다 확대하여 이해하면, 몸통이 포탄 모양으로 생긴 것 외에 주산알 모양인 것과 투겁에 세로로 이어진 둥근 고리 몸통 둘레에 여러 개의 둥근 가지 방울이 달린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주산알 모양인 것은 중국 길림시 후석산 79西M18 괴석조(塊石造) 돌널무덤에서 나왔고, 여러 개의 둥근 가지 방울이 달린 것은 부산 복천동 22호 구덩식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79西M18 괴석조 돌널무덤은 서기전 5세기 전후, 복천동 22호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400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간두령의 제작은 기존에 알려진 시간·공간적 범위보다 훨씬 넓었던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