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 노하심 고분군은 길림성 유수시 대파진 노하심촌 부근에 있는 철기시대 집터와 널무덤, 덧널무덤이 발견된 유적이다. 이 유적은 부여의 문화로 규정되고 있는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 중기의 대표 유적으로 이 유형의 고분이 129기가 조사되었다. 이 외에도 서단산문화의 주거지 2기와 발해의 말갈 고분 37기, 화려한 금은 제품, 각종 철기, 한나라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부여가 이 시기 중국 동북 지역의 최강자로서 군림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기원후 1세기 무렵 부여와 서한과의 문화적 교류도 확인할 수 있다.
부여문화(扶餘文化)로 규정되고 있는 포자연문화(泡子沿文化)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중기의 대표 유적이다.
1980년 7월 유수현 노하심촌의 마을 주민이 마을 남쪽에 있는 완만한 언덕의 서쪽 자락에서 모래를 파다가 무덤의 일부가 드러나게 되자 유수현문화국이 길림시문물관리위원회와 길림성문물국에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길림성문물국과 길림성문물공작대 및 길림시문물관리위원회가 연합발굴단을 조직하여 1980년 8월 13일부터 9월 말까지 관개수로 서측의 12,000㎡를 발굴 조사하였다.
1차 조사를 통해 유적이 하층, 중층, 상층의 세 문화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함은 물론 하층에서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서단산문화의 주거지 1기, 중층에서는 부여에 해당하는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고분 28기, 상층에서 발해(渤海) 조기에 해당하는 말갈 고분 3기를 조사하였다. 이후 1980년 겨울 관개수로 동측의 20,000㎡를 시굴 조사하였고, 1981년 4월에는 조양지구박물관에서 유적 전체를 세밀하게 실사하여 유적의 범위를 정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1981년 5월 2일부터 7월 15일까지의 기간 동안 길림성문물공작대와 길림성고고훈련반이 공동으로 관개수로 동측의 3980㎡를 발굴 조사하였다. 2차 조사를 통해 하층에서 서단산문화 주거지 1기, 중층에서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고분 101기, 상층에서 말갈 고분 34기가 조사되었다.
길림 노하심 고분군은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초기 유적인 길림시(吉林市) 포자연전산(泡子沿前山)과 후기 유적인 길림시 모아산(帽兒山) 고분군, 남성자(南城子) 성지의 중간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이다. 이 고분군의 조사를 통해 포자연문화의 전개 과정이 비교적 선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고분군에 부장되어 있는 화려한 금은 제품, 각종 철기, 한나라 유물 등을 통해 부여가 이 시기 중국 동북 지역의 최강자로서 군림하였음이 역사 기록 외에 물질 자료로도 입증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노하심 고분군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길림노하심고분군은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 중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은 길림시 포자연전산 유적을 표지로 하여 설정된 문화로서, 널(목관) · 덧널무덤(목곽묘) · 포자연형호 · 갈색타날승석문단경호 · 목항아리(단경호) · 모아산형(帽兒山型) 고병두(高柄豆) · 한식(漢式) 완형토기(碗形土器) · 천발(淺鉢) · 연령병식검(連鈴柄式劍) · 신수금동패식(神獸金銅牌飾) · 인면형동식(人面形銅飾) · 노하심형(老河深型) 금은제(金銀製) 귀걸이[이식(耳飾)] · 동복(銅鍑) · 철모(鐵矛) · 철부(鐵斧) · 철착(鐵鑿) · 각종 거마구(車馬具) 등이 주요한 유물 조합을 이루고 있다․
포자연문화 포자연유형의 분포 범위는 납림하(拉林河) 남안(북쪽)으로부터 이통하(伊通河) 유역(남쪽)까지, 농안현(農安縣)의 왕문산(王文山)(서쪽)으로부터 위호령(威虎嶺) 서사면(동쪽)까지이고, 존속 기간은 서기전 2세기~서기 3세기 초까지이다. 노하심 고분군은 이러한 포자연문화의 중기 포자연문화 북쪽 거점지에 형성되어 있는 군사 중진과 연관된 고분군으로 여겨진다. 고분에서는 각종 화려한 금은 제품과 함께 다종 다양한 철기류와 한경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서기 1세기 무렵 부여와 서한과의 문화적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