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솔뫼골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뒷산에서 땅을 파다가 좁은놋단검[細形銅劍]을 발견하였다. 그 뒤 수습 조사가 이루어져 ‘송산리 솔뫼골 고분’이라 불렸다.
당시 무덤은 주민들의 공사로 인해 바닥면에서 최대 20㎝ 정도만 남아 있었다. 남북 방향으로 자리한 무덤에서는 길이 2.3m, 너비 1m 정도의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구덩이 벽면에는 사람 머리 크기의 강돌이 2∼3단으로 막쌓아 올려져 있었다. 구덩이 안쪽의 남쪽 벽면 가까이에서는 좁은놋단검 1점, 여러 꼭지 달린 잔줄무늬 청동거울[多鈕細文鏡] 1점, 부채꼴 날을 단 어깨가 있는 도끼[有肩銅斧] 1점, 청동도끼 1점, 청동 새기개[銅鉈] 1점, 청동끌 1점, 철도끼 1점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의 구조과 크기는 발견 당시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즉, 벽면을 돌로 쌓은 모습은 움무덤·널무덤·덧널무덤과 달랐고, 특히 사람 머리 크기의 강돌로 성글게 벽면을 쌓은 것은 일반적인 돌널무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때문에 조사자들은 이 무덤을 ‘돌돌림무덤’, ‘위석묘(圍石墓)’라 이름 붙였다. 남한의 고고학계에서도 이러한 북한 학계의 조사 결과를 수용하여 ‘돌돌림무덤’을 특수한 유형의 고분으로 이해하였다.
다만 이 무덤은 서기전 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요녕성 대련(大連) 윤가촌(尹家村)12호 고분이나 대전 괴정동 고분, 아산 남성리 고분 등과 같은 유형의 무덤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또한 남성리 고분과 비슷한 유물이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북한 서부 일대와 금강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서해안 일대에서도 확인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이 무덤은 이전에는 돌덧널무덤, 돌널무덤, 널무덤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웠지만, 비파형동검 단계의 전형적인 돌덧널무덤이 좁은놋단검 단계 전후에 널과 덧널의 발전과 함께 퇴화되는 과정 중에 발생한 돌덧널무덤으로 해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