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원 우하량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중국 요령성 능원시(凌源市) 능북진(凌北鎭) 묘후촌(廟後村)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돌무지무덤과 제단 유구 관련 복합유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능원 우하량 유적은 중국 요령성 능원시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돌무지무덤과 제단 유구 관련 복합유적이다. 이 유적은 중국에서 단일유적으로는 드물게 1983년부터 현재까지 오랜기간 발굴조사되고 있으며, 아직 유적의 일부만 발굴 조사되었다. 가장 먼저 발굴 조사된 것은 여신묘이며, 이 묘가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돌무지무덤이 다양한 형태로 군집해 배치되어 있다. 이 유적은 중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기원전 30세기 요서 지역의 홍산문화가 이미 문명단계에 돌입하였다는 ‘요하문명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유적으로 표지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다.

정의
중국 요령성 능원시(凌源市) 능북진(凌北鎭) 묘후촌(廟後村)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돌무지무덤과 제단 유구 관련 복합유적.
개설

홍산문화 후기의 적석묘와 제단 유구의 복합 유적이다.

내용

능원시(凌源市) 능북진(凌北鎭) 묘후촌(廟後村)과 건평현(建平縣) 장복점향(張福店鄕) 마가구촌(馬家溝村)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능원시와 건평현이 경계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중국학계에서조차 이 유적의 소재지를 능원시로 소개하는 곳도 있고, 건평현으로 소개하는 곳도 있고 혼선이 일고 있다. 그러나 유적의 정확한 행정 소재지는 능원시이다.

1981년 요령성 일제 지표 조사 기간에 발견되어 1983년부터 현재까지 33년간 지속적으로 조금씩 발굴 조사되고 있다. 중국에서 단일 유적을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발굴 조사하는 사례는 몇 안되는데, 그만큼 이 유적이 갖는 표지성과 상징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 전체 16개 지점까지 편호되었다. 아직 유적의 일부만이 발굴 조사되었기에 유적의 지점 편호는 계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하량유적에서 가장 먼저 발굴 조사된 것은 제1지점의 여신묘이다. 여신묘(女神廟)는 평면 ‘中’자형의 반지하식 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 구조물은 주실, 주실 양측의 동측실과 서측실, 주실 남북의 남실과 북실, 남실 남측의 남단실(南單室)로 구성되어 있다.

적석총은 여신묘가 소재하고 있는 구릉의 정상부에 군집하여 배치되어 있는데, 1기가 단일 적석총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2기가 연축되어 있는 것, 여러 기가 연축되어 있는 것 등 다양한 형태의 것들이 있다. 적석총의 중심부 지하에는 판석으로 바닥석과 벽석 및 개석을 마련한 상자꼴의 석관이 배치되어 있고, 석관 내부에는 곧게 바로 펴서 묻힌 피장자와 함께 머리와 귀 부위를 중심으로 목부위, 복부, 기타 부위 등에 말발굽꼴 옥제 상투잡이, 옥룡(玉龍), 구운형옥패식(勾雲形玉佩飾), 옥벽(玉璧), 누에꼴 옥장식, 봉황꼴 옥장식, 인형(人形) 옥장식 등의 다종다양한 옥장식이 부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우하량유적은 중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요하문명론'의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유적이다. 요하문명론의 요점은 기원전 30세기 요서 지역의 홍산문화가 이미 문명 단계에 돌입하였다는 것이다. 요하문명론은 1981년 11월 중국 절강성 항주시(杭州市)에서 개회된 ‘중국고고학회 제3차연회’에서 발표된 손수도(孫守道)와 곽대순(郭大順)의 논문(「論遼河流域的原始文明與龍的起源」)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손수도와 곽대순은 능원시(凌源市) 성자산(城子山),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 부신현(阜新縣) 호두구(胡頭溝) 등 홍산문화 취락지와 적석묘 등에서 출토된 옥룡(玉龍) 등의 옥기를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기에 원시 농경(용의 기원과 관련), 사회 계층화, 권력, 예(禮), 예술과 종교가 발생하였고, 그러하기에 이를 초기 문명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곽대순의 이러한 주장은 1980년대 중국 고고학계의 대가이자 원로인 소병기(蘇秉琦)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이후 더욱 체계화, 구체화되어, 1995년에는 홍산문화의 적석 제단 · 여신묘 · 적석총 조합이 문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근거로 우하량 적석총과 제단이 최대 규모에 해당하는 1기를 중심으로 규모와 구조가 등급화되어 있고, 여신묘의 신상(神像)이 주신(主神)을 정점으로 하여 계층화되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즉, 홍산문화는 문명의 전야가 아닌 초기 문명이고, 초기 국가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산문화는 거대 종교 기념물, 대형 무덤, 직업의 전문화 현상이 확인되기는 하나, 이러한 류가 반드시 사회가 국가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심지어 부족 단계의 사회에서도 소규모 취락의 네트워크와 연대에 의해 얼마든지 축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두 요소만을 갖고 문명을 거론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하량의 대형 적석묘는 지상의 분구(적석)만이 거대할 뿐 매장 주체부의 규모와 부장품이 빈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고, 직업의 전문화도 옥기 외에는 단순하며, 취락의 위계화도 비교적 평등하여 국가 단계 또는 문명 단계의 유적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는가 한다.

물론 ‘요하문명론’은 요하 유역 등 중국 동북 지역에 중국 내지 등과는 다른 별개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중국 학계에서 학술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요하문명론’을 주장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결국 이 지역이 앙소문화의 충격을 받아 홍산문화 후기에 문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더욱이 홍산문화는 국제적인 학술 기준과 다른 문명의 물질적 발현 형태와 비교할 때 초기 문명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요하문명론’을 수용하는데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牛河梁遺址』(潮陽市文化局․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學苑出版社, 2004)
「論遼河流域的原始文明與龍的起源」(孫守道․郭大順, 『文物』 1984年 6期, 1984)
「遼西古文化的新認識」(郭大順, 『慶祝蘇秉琦考古五十五年論文集』, 文物出版社, 1989)
「遼寧史前考古與遼河文明探源」(郭大順, 『遼海文物學刊』 1995年 1期, 1995)
「동북아시아에서의 초기 문명 기원과 문명의 고고학적 발현」(오강원, 『한강고고』 창간호, 2007)
집필자
오강원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