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평야는 거의 범람원으로 이루어진 낙동강 하류의 내륙평야로 면적이 약 3,400ha에 이른다. 낙동강 변에는 해발고도 약 8m의 자연제방이 넓게 형성되어 있고, 남쪽과 서쪽 주변의 구릉지 또는 산지 밑에는 고도가 3m 정도인 상습적 침수지역이 넓게 자리한다. 상습적 침수지역은 본래 배후습지였던 곳이다. 대산평야가 오늘날과 같이 개발되기 전에 자연제방은 밭으로 이용되었고, 배후습지에는 자연상태의 ‘늪’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늪과 자연제방 사이에는 논이 분포하였다. 늪과 논은 낙동강의 역수(逆水)로 자주 물에 잠겼다.
대산평야는 1912년 일본인 무라이(村井)가 약 2,000ha의 배후습지를 확보해 촌정농장(村井農場)을 설립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촌정농장에서는 충적층 위로 솟아오른 일련의 작은 구릉들을 연결해 촌정제방을 쌓았고, 제방 끝의 주천강(注川江)에 갑문을 설치해 강물이 바깥으로 흘러나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남서쪽 구릉지 밑의 ‘늪’에 주남저수지(注南貯水池)를 축조하는 한편 그 바깥에 양수장을 설치해, 집중호우가 내릴 때에는 갑문을 닫고 농장 안의 빗물, 즉 내수(內水)를 주남저수지로 퍼내고 농업용수가 필요할 때는 그 물을 끌어다 쓰는 독특한 수리시설을 갖추었다.
밭으로 이용되던 촌정제방 바깥의 넓은 자연제방은 1920년 설립된 대산수리조합(大山水利組合)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즉 대산수리조합에서는 낙동강 제방을 쌓고 낙동강의 물을 퍼 올리는 본포양수장(本浦揚水場)을 설치해 자연제방의 밭을 모두 논으로 개답하였다. 낙동강제방은 1936년 증축되었고, 낙동강의 역수를 막는 주천강 하구의 갑문도 이때 설치되었다. 최근까지도 대산평야에서는 배수 중심의 수리시설이 계속 보완되어 왔다. 그러나 주남저수지 주변의 농경지는 해발고도가 3m 내외로 낮아 100㎜ 이상의 집중호우가 내릴 때는 침수피해를 면치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