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791년 2월 1일에 전라도 관찰사로 떠나는 정와(靜窩) 정민시(鄭民始)를 위해 짓고 쓴 어제어필 칠언율시이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민시는 1790년 12월 27일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한 달을 넘긴 이때서야 떠난 것은 이전부터 맡아온 주교사(舟橋司) 제조의 직분 때문이었던 듯하다. 주교사는 정조의 화성능행(華城陵幸) 때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치하는 일을 맡아본 관서인데, 정조는 1791년 1월 18일에야 화성능행을 마치고 환궁하였다.
어제시는 『홍재전서』권6 「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에 실려 있다. 정조는 “정성 어린 이별자리 여러 순배 돌았는데, 그대 보내는 명일에 동작진(銅雀津)을 나가겠지. 지금 어려운 일은 모름지기 민부(民部:호조)이니, 예부터 관찰사 직은 근신(近臣)에게 의지했네. 가벼운 옷차림의 새 관찰사를 다투어 보고, 대부인의 기거에도 탈이 없으리라. 누(樓) 이름 공북(拱北)은 참으로 우연이 아니니, 몇 밤이나 누에 올라 대궐을 바라볼런고.” 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전하고 민생에 진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정민시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세손 정조를 곁에서 보필하였고 정조 즉위 후 도승지·규장각 제학 등에 발탁되는 등 겸손한 자세로 절도를 지켜 정조의 극진한 아낌을 받았다.
이 어필은 사천(泗川) 출신의 재일교포 사업가 김용두(金龍斗, 1922~2003)가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바탕은 분홍색 비단으로 마름꽃·모란·박쥐·구름무늬를 금니와 은니로 그렸다. 어필 앞쪽에는 장수를 뜻하는 『시경(詩經)』 천보구여(天保九如) 구절을 새긴 타원형 인장을 찍었고, 말미에는 “홍재(弘齋)”, “만기지가(萬幾之暇)”라는 정방형 인장을 찍었다. 또 서축을 보관하는 오동 상자에는 김돈희(金敦熙)가 1930년에 쓴 “정조황제어제어필”이란 제서가 있고, 뚜껑 안쪽에는 정병조(鄭丙朝)의 1930년 발문과 일본 군국주의 언론인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의 1940년 제서가 있다. 그중 정병조는 “이 비단 바탕은 청 건륭제가 칙명으로 만든 겹마름꽃무늬 비단(重菱花綃)”이라 하였다. 현존하는 대폭의 정조어필 가운데 늘씬한 짜임과 유려한 필치가 돋보이는 수작으로 조맹부 또는 안평대군 서풍에 가깝다. 정조는 재위 후반에 문장과 글씨의 올바른 기준을 세우고자 노력했는데, 그가 제시한 모범적인 글씨 가운데 조맹부와 안평대군의 글씨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