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장암 목조 비로자나불 좌상 (서울 )

조각
유물
문화재
서울 지장암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시대 목조비로자나불상.
정의
서울 지장암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시대 목조비로자나불상.
개설

200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왕실 비구니 사원인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에 봉안되었던 나무로 만든 비로자나불좌상이다. 1622년에 제작되었다. 두 손을 모아 왼손 주먹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 비로자나불상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조선 후반기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내용

다른 절에서 옮겨 온 이 비로자나불상은 대좌가 결실되었다. 머리는 반 타원형이며 육계(肉髻)의 표현이 없고 나발(螺髮)이 촘촘하다. 정상계주(頂上髻珠)는 높고 큼직하며 중심계주는 반달형으로 큼직한 편이다. 이런 특징은 현진(玄眞)이 제작한 법주사 대웅전 소(塑)삼신불좌상(1626년), 무량사 아미타불상(1633년), 관룡사 대웅전 목 삼세불좌상(1629년)의 머리와 유사한 편인데 특히 관룡사상과 가장 유사하다.

얼굴은 직사각형이지만 이마에서 점점 높아져 콧날이 날카롭게 표현되었고 턱으로 내려가면서 입 주위를 들어가게 하면서 턱을 좁게하고 눈은 가늘고 길게 옆으로 표현하여 좀 더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 역시 현진이 제작한 관룡사 대웅전 석가불상(1629년)과 유사하다.

상체는 정사각형에 가깝지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왼주먹을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자세 때문에 어깨를 약간 움추린 모습이다. 어깨와 가슴, 그리고 노출된 오른 팔 등에 보이는 양감의 표현은 인상적이다. 이는 1614년 현진이 제작한 천은사 목관음세지보살상과 유사하며, 관룡사 목삼세불상 본존과는 약간 나온 아랫배 표현이 유사하다. 하체는 상체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높고 단정하며 무릎은 둥글게 표현하였고 오른발을 위로 올린 항마좌(통칭 길상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체와 무릎의 너비는 관룡사상과 유사하지만 관룡사상보다는 체구가 크지 않은 편이다.

이 불상의 착의법(着衣法)은 통견의(通肩衣)이지만 당시 유행한 2중착의법이 아닌 대의(大衣) 한 겹의 통견의이다. 그러나 왼쪽 배에서 왼쪽 어깨를 넘어 오른쪽 어깨를 지나 팔꿈치를 뒤로 감싸고 깃을 날카롭게 세우면서 왼쪽 팔목으로 뒤집어 넘긴 독특한 통견의 착의법인데 여기서 흘러내린 대의자락은 오른발을 그대로 두면서 무릎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팔로 올라간 사선의 붓질선, 오른쪽 어깨에서 오른 팔꿈치 뒤로 넘긴 S라인으로 표현된 날카로운 깃, 팔을 감싸고 올라간 세 가닥 직선주름과 다시 오른쪽 팔꿈치를 감싸면서 왼쪽 팔목으로 걸쳐진 특징, 양쪽 무릎에서 발목으로 올라간 두 가닥의 옷 주름, 왼팔 측면의 Ω형 주름 등은 현진이 제작한 불상의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이 불상은 복장물인 불상조성기와 후령통·화엄경·법화경 같은 경전·다라니 등을 통해 불상의 제작연도를 알 수 있다. 즉 조성기는 광해군 말년 경인 1622년에 비로자나 불상을 조성한 유래를 적은 것으로, 선조의 왕비인 장열왕후와 광해군 비와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이 가문·왕실 종친을 위해서 왕실 여인들의 출가 사원인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에 조성·봉안한 귀중한 조선 후반기 왕실 발원 불상이다.

참고문헌

『지장암의 역사와 문화』(문명대, 오진희, 전윤미, 한국미술사연구소, 2010. 3)
「17세기 전반기 조각승 현진파의 성립과 지장암 목 비로자나불상의 연구」(문명대, 『강좌미술사』29, 한국미술사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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