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상은 불교의 천불신앙에 근거해 천 구로 조성된 불상을 가리키는 불교 조각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부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다불사상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천불상이 형상화되었다. 천불상은 천 구 정도의 상을 한꺼번에 일괄로 만들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형태를 띤다. 이 상들은 대부분 여러 종류의 본존상과 결합되어 불세계의 장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현존 최고의 천불상은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이다. 향천사 천불상·직지사 천불상·대흥사 천불상 등이 대표적이다. 천불상의 개념과 수를 확장한 삼천불상도 있다.
세상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수많은 부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대승불교의 다불(多佛)사상이 확대됨에 따라 천불신앙도 체계를 갖추어 전개되었다. 불교에서는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 현재현겁(現在賢劫), 미래성수겁(未來星宿劫)에 각각 천 명의 부처가 있다고 보아 이들을 삼천불(三千佛)이라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천불’이라 하면 좁은 의미에서 현재현겁의 천불을 가리킨다.
천불상은 중국의 남북조시대부터 석굴사원과 불비상(佛碑像)에 빈번히 표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형상화되었다. 조성 방법은 1,000구 또는 그에 가까운 수의 상을 각각 환조로 만들거나 하나의 면에 행과 열을 맞춰 반복적으로 부조하는 두 가지가 있으며, 한꺼번에 일괄로 만들기 때문에 대부분 서로 비슷한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천불상 자체가 독립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지기도 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본존상과 결합되어 불세계의 장엄이라는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천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이다. 이 상의 광배 뒷면에는 연가(延嘉) 7년에 고구려 낙랑(평양) 동사(東寺)의 승려 40명이 현겁천불을 만들어 유포하였고 이 상은 그 29번째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이라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상의 제작시기는 539년으로 추정되며, 인현의불은 300년경 축법호(竺法護)가 한역한 『현겁경(賢劫經)』에서 천불 중 29번째로 등장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의 현겁천불신앙을 증명해 준다. 이와 더불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양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출토 소형 소조불보살상편 300여 점 또한 고구려 6세기에 제작된 천불상의 일부로 이해되기도 한다.
부조로 만든 천불상으로는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충남 연기 서광암(瑞光庵) 발견의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을 들 수 있다. 정면의 불삼존상 위쪽과 양 측면에 약 1,000구의 작은 여래좌상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 이 불비상은 명문에 따르면 통일신라 초인 673년(문무왕 13)으로 비정되는 계유년에 옛 백제지역의 향도(香徒) 250여 명이 발원하여 국왕과 대신(大臣), 칠세부모(七世父母) 등을 위해 석가불과 여러 불보살을 만든 것이다. 천불상이 석가삼존불과 함께 조성된 이른 예에 해당한다.
광주 무등산 원효사 대웅보전 하층에서 출토된 고려조각의 양식을 띠는 100여 점의 소조불상편은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와 보현보살상과 함께 발견되어 고려시대 당시 천불과 비로자나삼존불이 결합된 신앙 형태를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중건한 천불전 안에 주존불상 주위로 층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소형의 석조천불좌상을 모셔놓은 예가 여럿 전한다. 대표적으로 충남 예산 향천사 천불전, 경북 김천 직지사 천불전, 전남 해남 대흥사 천불전(1817년)의 상들을 들 수 있다.
천불상의 개념과 수를 확장한 삼천불상도 적지 않게 조성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7세기 선덕여왕 때 활동했던 승려 양지(良志)는 벽돌을 조각하여 탑과 삼천불을 만들어 절 안에 모셨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양지가 머물렀던 경주 석장사지(錫杖寺址)에서 발견된 여래좌상이 찍힌 전돌들을 문헌기록의 삼천불상으로 보기도 한다.
통일신라 말 선종산문의 하나였던 충남 보령 성주사(聖住寺)는 사적기에 의하면 삼천불전(三千佛殿)에 본존인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삼천불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 절터를 발굴한 결과, 삼천불전 건물지와 함께 삼천불상의 일부로 추정되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작은 소조불상편 130여 점이 확인된 바 있다.
고려 후기인 1313년(충선왕 5)에는 개경의 왕실사찰인 민천사(旻天寺)에 왕명으로 아미타삼천불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미타불로 삼천불을 만든 점이 특기할만하다. 이 절터 출토로 알려진 미타정인(彌陀定印)의 수인을 맺은 높이 40cm 정도의 금동아미타불좌상을 당시에 안치했던 삼천불상의 일부로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