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일률은 시와 그림의 창작 원리와 경지가 같다고 하는 문예론이다. 북송의 소식이 ‘시 속에 그림’, ‘그림 속에 시’라고 표현한 데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시화일률은 고려 중기에 문인화론과 문인화가의 대두와 더불어 전개된다. 이후 시화일률은 시와 그림이 융합되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창작론으로 발전했다. 또한 이는 문인화론의 핵심을 이루면서 비평의 기준이 되었다. 고려 후기 이인로는 그림을 소리 없는 시, 시를 소리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문예론은 그림을 시와 동질적 창작 매체로 인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와 그림 모두 우주만물 생성화육(生成化育 : 자연이 끊임없이 만물을 만들고 길러냄)의 도(道)와 천지조화의 자연법칙과 같은 창생의 이치와 내면적 진리로 창작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 이론은 주객이 합일된 상태로 작가의 마음과 사물의 참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문사들의 예술사상과 결부되어 전개되었다.
북송의 소식(蘇軾)이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와 그림에 대해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하여, 시와 그림이 같은 이치와 법칙을 지닌 것으로 평가한데서 유래되었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시와 그림은 모두 하늘의 창생술인 ‘천공(天工)’과 합일하여 기운이 ‘청신(淸新)’한 작품을 창출하려는 작가의 마음 속 뜻을 나타낸 것으로, ‘시화본일률(詩畵本一律)’이라 하였다. 이후 시화일률은 문인화론의 핵심을 이루면서 문인화 창작의 지향 목표이며 감상 및 비평의 기준으로 작용되었다. 화면에 시를 적어 넣는 풍조와 더불어 시를 그림으로 그리는 시의도(詩意圖)와 그림을 시로 읊는 제화시(題畵詩) 분야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에 문인화론과 문인화가의 대두와 더불어 전개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는 화원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 말기 여항문인화가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며 성행되었다.
시화일률은 매체 형식이 다른 시와 그림의 창작이 동일한 이념과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경지에서 이룩되어야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사물 형상의 서술과 묘사에서 형상 너머의 창생적 본질을 우주만물의 공통의 원리로 파악하는 유기체적 자연관과 결부되어, 시와 그림의 창작과 향유는 도를 추구하고 도와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시와 그림이 융합되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창작론으로 발전했으며, 내․외적인 결합을 지향하며 전개되었다. 북송의 휘종이 시와 그림이 융합된 화풍을 강조했으며, 남송 회화에서 이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의 이인로(李仁老)는 “시와 그림이 오묘함에서 서로 근원이 같아 일률이라 하고 옛사람은 그림을 소리 없는 시, 시를 소리 있는 그림이라 했으니, 물상을 모사하여 하늘의 비밀을 나누어 내는 기술이 서로 기약하지 않아도 같기 때문이다(詩與畫妙處相資 號爲一律 古之人 以畫爲無聲詩 以詩爲有韻畫 蓋模寫物象 披割天慳 其術固不期而相同也)”고 했으며, 조선 초의 성간(成侃)은 “그림과 시는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전혀 가릴 수 없다(詩畵爲一致 輕重未可分毫釐)”고 하였다. 조희룡(趙熙龍)을 비롯한 조선 말기의 여항문인화가들은 시와 그림은 같은 이치와 하나의 법으로 이룩되며, 시는 그림으로 참여하고 그림은 시로 참여하는 것이기에 서로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시화의 융합을 절대시하였다.
시화일률 사상은 그림을 시와 동질의 창작 매체로 인식케 함으로써, 그림의 지위 향상과 함께 문인 사회에서 그림 창작이 성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화단에서 문인화는 주류가 되었고 그림의 문학화에 결정적 작용을 했으며, 직업화가보다 문인화가를 더 높게 평가하는 풍조를 이루었다. 사의(寫意)에 의한 수기(修己)의 매체로 고도의 격조를 이룩하는데 기여했으나, 지식층 위주로 전개되어 대중과 유리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