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극동전선군 제팔팔독립보병여단은 1942년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중국 공산당 소속의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창설된 군대이다. 88여단, 88특별저격여단이라고도 한다. 부대의 주요 임무는 소련·만주 국경 지역 정찰이었는데 소규모 빨치산 부대를 창설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임무도 주어졌다. 88여단은 조선인이 조선 해방전투에 참여한 근거이며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의 한 부분이다. 김일성은 이 부대에서 최용건, 김책, 허형식 등 조선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은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 만주지역의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항일 빨치산 부대를 만들어 저항하였다. 이들 부대는 1936년 3월에 이르러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었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3개 사단을 두었는데, 그 중 제3사는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였다. 제3사는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활동무대도 백두산 부근이었다. 같은 해 7월 항일연군 1, 2군이 통합되어 제1로군이 되었고, 제3사는 제6사가 되었다. 김일성이 이끄는 제6사는 1937년 6월 4일조선의 보천보를 습격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1937년부터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 만주의 항일연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1940년 초 항일연군 지도부는 소련 측과의 협의를 통해, 소련령으로 들어가는 부대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후 항일연군은 소련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김일성의 제2방면군(그동안 군제 개편이 되면서 6사는 다시 제2방면군이 되었다)도 소련으로 들어갔다.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으면서도 일본을 견제하고 있던 소련은 자신의 영토에 들어온 항일연군을 적절히 활용할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 이들을 주축으로 한 여단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여단을 창설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고 8월 1일 소련 적군 제88독립저격여단(88 Otdel’naya Strel’kovaya Brigada)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9월 15일경 부대 편성이 완료되었다. 명칭도 88독립보병여단(88여단)으로 확정되었다. 여단은 소련 극동전선군 군사회의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있었으며, 여단장은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장 저우바오중(周保中)이 맡았다. 참모부장은 소련인 사마르첸코가 맡았고, 예하의 각급 부대장은 조․ 중 빨치산 지휘자들이 맡았다. 부지휘관(부대대장)은 소련군관이 담당하였다. 정치담당 부지휘관도 항일연군 측에서 맡았다. 여단에는 4개의 대대와 독립통신대대, 독립보병대대가 있었고, 1944년에는 자동소총대대가 신설되었다. 자동소총대대는 현지 소수민족들을 포함한 소련인들로 구성되었다. 제1대대는 항일연군 제1로군의 조선인 대원들을 기본으로 구성하였고, 대대장은 김일성이었으며, 안길이 정치담당 부대대장을 맡았다. 최용건은 여단의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소련으로 들어온 동북항일연군은 대략 590명 정도였고, 이들 중 최소 190여 명은 조선인으로 확인되고 있다. 590여 명 중 197명은 소련군 첩보기관으로 파견되었으며, 다수의 여성대원을 포함한 60여 명은 집단 농장으로 갔고, 12명은 휴양소나 병원으로 보내졌다. 이처럼 다른 기관으로 파견된 이들을 제외한 320여 명이 여단에 편재되었고, 그중 조선인은 약 1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88여단의 주요 임무는 소만(蘇滿) 국경지역 정찰이었다. 한편으로 이들에게는 만주지역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묶어 소규모 빨치산 부대를 창설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에 따라 여단은 소규모 부대를 만주로 파견해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주민들 사이에 들어가 비밀 조직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전투행위는 최소한의 범위에서만 이루어졌다. 1943년 이후에는 이들 소규모 부대 활동은 급감하였고, 정찰활동에 한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여단의 임무는 일본의 패망이후를 겨냥한 역량 보존에 맞추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단 내에도 중국공산당 조직이 가동되고 있었는데, 1945년 7월 말신동북위원회와 조선공작단으로 재편되었다. 조선공작단의 지휘체계는 김일성이 군사정치, 최용건이 당의 영도, 김책이 두 사람을 지원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해방 후 조선에서의 활동에 맞추어졌다.
1945년 8월 9일 소련극동전선군의 전면적인 대일전을 앞두고 여단의 소련국적 대원 344명이 다른 부대로 차출되어 나갔고, 290여 명의 조중 국적의 대원들은 만주지역 정찰업무에 동원되었다. 대일전이 개시되고 난 직후인 8월 11일 여단 주력병력은 참전 대기 명령을 받고 전투준비에 돌입하였지만, 곧이어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실질적인 전투참여는 없었다.
대일전이 종결된 후 여단 병력은 개별적으로 소련군 점령지역의 경무사령부에 배치되었다. 김일성이 이끌고 있던 제1대대 병력도 조선의 38선 이북 각 지역 경무사령부 부사령관 및 고문으로 47명, 통역 15명, 지역방위 및 기타 기관으로 37명이 배치되었다. 여단의 중요 인물들에게 소련은 적기훈장을 비롯해 1급 조국전쟁 훈장, 2급 조국전쟁 훈장, 붉은별 훈장, 용맹 메달, 전투공훈 메달 등을 수여하였다. 김일성은 “1931∼1940년 만주에서 일본 점령자들과의 투쟁에서 빨치산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소속 부대를 전투 작전에 훌륭히 준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여단장 저우바오중, 참모장 쉬린스끼, 부참모장 최용건 등과 함께 최고훈장인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88여단은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의 한 부분이면서 조선 해방전투에 조선인들이 참여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이 부대에 관해서 역사적인 평가를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김일성 부대의 위상이 약화되고 김정일의 탄생지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부대에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에서 활동하던 최용건, 제3로군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책과 허형식 등 조선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모두 만나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조선인 대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는 이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