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자는 해방 이후 남한 또는 대한민국에서 북한 지역으로 스스로 이주한 사람을 일컫는다. 이들이 월북한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해방 이후 미 · 소의 분할점령 및 정부수립 전후 시기, 전쟁 시기, 그리고 전쟁 이후 시기이다. 앞의 두 시기에는 38선을 경계로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들이고, 전쟁 후에는 휴전선 이북으로 넘어간 사람들이다.
월북 또는 월북자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와 같이 남북으로 국토가 분단된 상황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특수한 용어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심하기 때문에 월북과 월북자라는 용어는 매우 정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제적인 의미에서 월북과 월북자는 각각 망명과 망명자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월북자는 정치적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 사상적으로는 공산주의자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월북자는 친북 · 공산주의자와 동의어가 된다. 이 같은 인식 때문에 원래부터 북한에서 활동하거나 고향이 북한인 문학가, 미술가들도 월북자로 취급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남쪽에 연고를 가진 월북자들은 언제든 남쪽으로 내려와 간첩행위를 할 수 있는 예비간첩집단으로 이해되었다. 더불어 월북자 가족은 간첩이 된 월북자들에게 포섭될 가능성이 큰 위험한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접촉하면 안 될 감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시의 대상을 확정하기 위해, 또는 그러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월북의 자발성이나 강제성을 따지게 되었다. 월북의 강제성을 극명하게 표현한 용어가 납북자이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월북자와 구별되는 납북자라는 용어는 한국에서의 생존을 위한 용어가 되었다. 월남자의 경우 그 강제성이나 자발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모두 월남자로 호칭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월북자들이 탄생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미군정시기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명시적으로 공산당을 불법화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이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였다. 미군정 당국의 체포령을 피해, 또는 원활한 정치활동을 위해 박헌영을 비롯한 남조선로동당(남로당) 활동가들이 활동의 근거지를 38선 이북 지역으로 옮기면서 월북자가 탄생하였다. 해방 공간에서는 이들 정치가들 이외에도 문학가, 예술가를 비롯한 상당수 지식인들이 월북의 길을 택하였는데, 대부분 사상의 자유를 찾아 월북한 경우였다. 일부의 경우는 김일성종합대학 등 북한 교육기관의 교원으로 초청받아 월북한 경우도 있었다.
두 번째 월북의 계기는 남북협상과 정부수립이었다. 1948년 4월 김구, 김일성을 비롯한 남북의 정치인들은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남북협상을 벌였는데, 이 때 남측에서는 수백 명의 정치인과 사회운동가들이 참여하였고, 이들 중 일부가 북측에 잔류하였다. 또 연이어 진행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도 최소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월북해 정권 수립 과정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전쟁 발발 때까지 크고 작은 월북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표무원 · 강태무 부대 월북 사건’이었다. 두 사람은 춘천에서 각각 대대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1949년 5월 훈련을 가장해 각각 대대원 355명과 300명을 이끌고 월북해 버렸다. 이들 이외에도 전쟁 발발 직전까지 국군의 월북이 적지 않았는데, 대부분 전쟁 때 북한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대부분의 월북자는 전쟁 시기에 발생하였다. 전쟁이 발발한 후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자진 월북하였다. 또 최소 십만에서 수십만 명의 청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의용군에 입대해 인민군이 되었다. 각 지방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인민군 점령을 계기로 공개 정치활동을 펼치다가, 인민군 후퇴시기에 빨치산이 되거나 월북의 길을 택하였다. 전쟁 시기에 월북한 사람들의 숫자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납북자를 포함해 10만 명에서 60만 명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52년 한국 정부가 공식 조사한 월북자는 1만여 명이다. 그러나 현재 실제로 얼마만큼의 사람이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월북의 길을 택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전쟁 후에도 다양한 경로와 다양한 사람들의 월북이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외무부장관 등을 지냈던 최덕신의 월북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로 10여 년 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86년 월북하였다. 이외에도 최근까지 반정부인사, 군인, 사업가, 공무원, 유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의 월북이 있었다. 전쟁 이후 월북자는 약 600명으로 추정되고 그 중 60% 이상이 군인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통계는 공개되지 않았다. 월북자들 중 일부는 매년 김일성 전 주석의 생일을 기념해 평양방송에 좌담 형식으로 출연해 자신들의 생활을 증언하는 등 선전사업에 활용되기도 한다.
한편 월북자들의 가족은 월북에 대한 사회 · 정치적 편견으로 인해 수십 년 간 연좌제와 사회적 멸시 속에 아픔을 견뎌야했다. 1980년 헌법에 연좌제 금지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연좌제는 공식 폐지되었지만, 아직까지 사회적 편견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기는 어렵다. 월북자의 문학과 예술작품들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1988년에 이르러 정부수립 이전의 순수 예술작품에 한해 해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