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8월 5일 발표된 김일성의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에 관한 방침을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1953년 하반기 6개월의 준비단계를 거친 후, 1954년부터 1956년까지 3년간 진행되었다. 소련과 동구권, 중국 등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 기간 동안 연평균 42%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북한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1953년 8월 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모든 것을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하여’를 발표하고 전후 복구 계획의 기본 방향을 정립하였다. 이 계획의 기본 방향은 중공업우선의 경제건설 노선이었다. 이 보고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기업소들의 확장과 인민생활 안정을 위한 경공업을 급선무로 복구건설하여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 “공업의 복구건설에서 선후차를 규정함이 없이는 인민경제의 전반적 복구를 지연시키며 막대한 재정, 자재, 원료, 로력의 랑비를 초래할 수 있으며 그를 사장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공업건설에서 “인민경제의 전반적 복구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는 기본 공업시설부터 건설”할 것을 강조하여 중공업 우선정책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또한 김일성은 전후 인민경제복구 건설사업을 세 단계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그것은 반년 내지 1년 동안의 준비사업과 정리사업 단계, 3개년 계획 단계, 공업화 기초 축성을 위한 5개년 계획 단계였다. 그리고 이 과정을 공업화 1단계로 규정하였다. 이 같은 기본 방침에 따라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이 1954년부터 시행되었다.
중공업우선의 전후 복구 계획은 1953년 하반기 김일성의 소련 및 중국방문을 거치면서 일부 수정되었다. 그것은 1953년에만 10억 루블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등 가장 많은 재정 지원을 하고 있던 소련이 중공업 우선정책에 회의적이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에 따라 소련계는 경공업우선 정책을 주장하고 나섰다.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연안계 또한 이 같은 정책에 공조하는 분위기였다. 1954년 국가 예산 수입 전체에서 대외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34%에 이르는 상황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강력한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1954년 3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진행된 후, 소련계인 박창옥이 국가계획위원장, 연안계인 최창익이 재정상을 맡는 등 경공업중시파들이 경제건설의 핵심으로 약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지만 이들은 중공업우선세력의 벽을 넘지 못하고, 1954년 11월부터 자리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1955년 후반기에는 중공업우선세력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고, 이 같은 갈등은 결국 1956년 8월전원회의 사건(소위 ‘8월 종파사건’)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였고, 소련계와 연안계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한편 경제정책을 둘러싼 노선투쟁의 와중에도 경제 복구 사업은 전국적으로 엄청난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로력영웅’들이 탄생하였다. 1951년 7월 제정된 ‘로력영웅’ 칭호는 ‘공화국영웅’ 다음으로 영예로운 것이었다. 이 칭호는 경제․문화·건설 부문의 공로자들에게 수여된 것으로 노동자들의 전후복구 열기를 북돋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전후복구의 열기 속에 1954년 4월부터는 농업협동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3개년 계획이 끝난 1956년 말까지 농가의 80.9%가 협동조합에 가입하게 되었다. 1956년부터는 자본주의적 기업 경영을 하는 상공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상공업 협동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1953년 8월부터 6개월 여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에 본격 진행된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은 목표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마무리 되었다. 공업생산은 1953년도에 비해 2.8배, 농업생산은 1.23배 증가했다. 공업부문에서 생산수단은 4배, 소비재는 2.1배 증가하였다. 이는 전쟁 이전인 1949년보다도 1.8배 늘어난 것이었다. 이 기간 중 연평균 공업성장률은 42%에 달했다.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은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건설과 함께 진행되었다. 경제건설 노선의 측면에서는 김일성의 중공업우선 정책이 승리하고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소련계와 연안계가 주장한 인민생활과 밀접한 경공업우선 정책을 일부 수용하여 중공업우선 정책을 유지하되 농업과 경공업부문에서도 어느 정도 투자를 하는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농업의 동시 발전’ 방침으로 정리되었다. 한편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의 성공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적극적인 지원과 중국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계획의 성공으로 북한은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은 경제건설 노선의 확립과정인 동시에 북한식 노동체계의 형성과정이었다. 또한 그것은 사회주의 경제의 기반 조성과정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