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민주주의, 민족적 독립과 사회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진보성향 및 좌익계열에 속하는 세계청년학생들의 단결과 친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평양에서 1989년 7월 개최된 축전이다. 북한당국의 주장에 따르면 전세계 177개국에서 22,000여명의 청년학생 대표가 참가하여 ‘서울올림픽’ 보다 그 규모가 큰 행사였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세계민주청년연맹’의 주관하에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首都)인 프라하에서 ‘세계청년학생’ 제하(題下)로 처음으로 열린 이 축전은 제2차 축전부터는 ‘국제학생동맹’이 공동으로 주관하게 되면서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개칭(改稱)되었다. 1957년 소련에서 개최되었던 제6차 모스크바축전에는 34,000여 명의 인원이 참가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으나, 이후부터 ‘공산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대회로 변질되었다. 북한당국은 이 축전을 통해 그들 사회가 ‘청년학생들을 위한 제반 교육제도와 시설을 갖춘 사회주의 선진국’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체제선전을 위한 계기로 활용하였다. ‘평양축전’ 이후 전세계적인 냉전구조 해체와 공산권국가의 몰락으로 이 축전에 참가하는 인원은 점차 감소추세에 있다.
평양에서 열린 이 축전을 줄여서 ‘평양축전’이라고도 칭하는데, 기간 중 “정치토론, 연대성집회, 상봉모임” 등 정치행사와 문화예술활동, 체육경기 등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당시 북한 당국은 이 축전(祝典)을 ‘국가적인 역점사업’으로 중점을 두어 진행하는 가운데 관련 행사에의 자원집중투자 및 주민의 노력동원, 청년학생들의 기념행사 준비 등에 진력하였기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운 주민경제는 더욱 피폐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축전을 위해 북한당국은 릉라도5.1경기장, 평양국제영화회관, 동평양대국장, 평양교예극장, 양각도축구경기장, 평양국제통신센터, 만경대소년학생궁전 등 대규모 경기장, 공연장, 호텔 등을 지었다. 이 때문에 북한경제는 1984년 9월 대남수재지원 이후 수년간 ‘침체’되었던 형국과 같이 급락(急落)하였다. 또한 177개국의 청년학생 대표가 대규모 참가하였다는 선전과는 달리 이 축전으로 북한이 거둔 국제적 이미지와 위상제고효과는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많은 역효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특히 이 대회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불법적으로 참가한 ’임수경‘은 북한주민들로부터 이른바 ’통일의 꽃‘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방북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 국내외적으로 매우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하계올림픽에 큰 자극을 받았던 북한당국이 자국의 국제적 위상강화를 위해 무리하게 유치한 축전이었다. 북한당국의 주장에 따르면 전세계 177개국에서 22,000여명의 청년학생 대표가 참가하여 ‘서울올림픽’ 보다 그 규모가 큰 행사였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으나, 이 축전에 참가한 국가대표들은 북한당국으로부터 체제비 전액 및 소정의 사례비를 받는 조건으로 온 해당국가의 ‘대표성’이 없는 친북계 인사나 무직(無職)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당국의 요란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이 축전은 ‘무리수(無理數)를 둔 실패작’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