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출신과 가계 등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이선(李僐)은 1244년(고종 31) 우정언(右正言)으로 있던 때, 당시 무신집권자 최우(崔怡)가 낭장(郎將) 신착(申着)을 안찰사(按察使)로 임명하자, 신착은 무신이라서 안찰사로 적절치 않다고 탄핵했다. 최우는 분노하여 이선의 관직을 낮추어 평안도의 연주부사(延州副使)로 좌천시켰다.
1250년(고종 37) 12월 최우의 뒤를 이어 집권한 최항(崔沆)은 당시 시어사(侍御史)였던 이선 등 4명을 제거하였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최항이 아직 승려 만전(萬全)으로 지내던 시절, 보주부사(甫州副使) 조염우(趙廉右), 도강감무(道康監務) 박장원(朴長原)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염우와 박장원은 자신이 관할하던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던 최항을 제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최항은 권력을 잡은 이후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런데 이선은 원래 조염우 등과 가까웠다. 이선이 경상도 안찰사가 되어 고성현(固城縣)을 방문했을 때, 이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 잔치에는 현령(縣令) 권신유(權信由)도 참석했다. 뒤에 어느 승려가 이선이 권신유, 조염우, 박장원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고 무고하자, 최항이 이들을 모두 살해했던 것이다.
이선이 우정언과 시어사를 지내면서 최씨집정에게 거침없이 직언을 한 것으로 보아 무신집권기 최씨정권에 비판적인 간관(諫官)이었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