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옹성 남문 ( )

철옹성 남문
철옹성 남문
정치·법제
유적
북한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조선후기 영변 철옹성의 남쪽 문(門). 성문 · 성터.
이칭
이칭
영변남문, 만노문, 완월문, 고연주성문, 운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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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조선후기 영변 철옹성의 남쪽 문(門). 성문 · 성터.
개설

영변철옹성은 본성, 약산성, 신성, 북성 등 4개의 부분성으로 이루어졌다. 영변읍을 돌아 쌓은 본성과 본성 안의 서쪽 부분을 구획한 약산성은 고구려 때의 성이고, 그 밖의 부분성들인 북성과 신성은 그 이후에 쌓은 성이다. 이 성들을 포괄하여 일반적으로 영변철옹성 또는 철옹성이라고 부른다. 철옹성남문은 영변철옹성의 정문으로 안주, 평양 지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성문이었다. 영변남문이라고도 하며 만노문, 완월문, 고연주성문, 운주루라고도 하였다. 지금도 문루의 1층에는 만노문, 2층에는 고연주성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북한에서는 철옹성남문을 국가지정문화재국보급 제49호로 지정해 놓고 있다.

역사적 변천

철옹성남문은 고구려시기철옹성을 쌓으면서 처음 세웠고 1658년(효종 9)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다음해에 단층으로 중건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중층으로 재건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그때 재건한 것으로 1824년에 축대의 홍예문을 보수한 일이 있다. 남문은 본래 다른 곳에 있었으나 그 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문의 위치는 양쪽 성벽에서 약 40m 가량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형태로 마치 옹성과 같은 기능을 갖게 되었다.

남문은 축대와 문루로 이루어졌다. 축대는 돌로 쌓았으며 높이가 약 8m이다. 그 복판에 높이 4.55m의 말발굽형 홍예문을 냈다. 문에는 쇠비늘을 붙인 쌍여닫이 널문이 달려 있고 문 위에는 불 끄는데 쓸 물을 담아 두던 오성지가 있었으나 일제가 부셔버렸다. 축대 위에는 정면 3칸(12.67m), 측면 3칸(8.3m)에 합각지붕을 얹은 2층 문루를 세웠다.

기둥은 흘림 형식으로 하였는데 앞 열의 네 기둥 밑에는 4각 돌기둥을 바쳐 비바람의 피해를 막게 하였다. 정면의 기둥은 높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이어 세운 것이다. 기둥 위에는 1, 2층 모두 바깥 5포, 안 7포의 포식두공을 얹었는데 제공은 꽃가지형으로 하였다. 지붕의 마루들에는 흥미있는 장식들을 올렸으며 성문에는 은근한 모루단청을 입혔다.

의의와 평가

철옹성남문은 북한에서 대동문이나 보통문에 비길 수 있는 우수한 성문의 하나로서 18세기의 성문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 문헌

『조선향토대백과』5(한국 평화문제연구소·조선 과학백과사전출판사 공동편찬, 평화문제연구소, 2006)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Ⅰ(조선유물유적도감편찬위원회 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북한문화재 자료관(north.nricp.go.kr)

북한지역정보넷(www.cybern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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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진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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